최우성 | 산업부장
주요 대기업의 2021년도 정기 임원 인사가 한창이다. 한해의 경영실적을 토대로 새해 사업방향과 경영계획을 짜는 작업과 맞물려 진행되는 대기업 임원 인사는 해마다 재계 전반의 큰 관심사다. 올해 인사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유독 관심이 집중된 재벌 대기업을 꼽으라면 단연 롯데다. 사드 사태의 여파로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며 어려움을 겪던 차에 코로나19의 직격탄까지 맞은 게 롯데의 처지였다. 시원찮은 성적을 거둔 건 당연한 결과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롯데그룹은 600여명인 전체 임원 수를 20% 줄이는 인사를 단행했다. 주요 그룹이 올해 인사의 열쇳말을 ‘안정 속 변화’로 잡은 것과 크게 대비된다.
최근 몇년 새 5대 그룹(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롯데) 가운데 롯데의 상대적 위상이 해가 갈수록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지우기 힘든 게 사실이다. 5대 그룹 전체 매출 대비 롯데 매출의 비중이 몇년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찌감치 차세대 산업 공략과 새 먹거리 찾기에 나서 열매를 따기 시작한 나머지 4개 그룹의 행보와 견줘, 뒤늦게 쇄신을 부르짖는 롯데의 분투는 위기의 상징적 징후로 읽힌다.
단지 특정 그룹의 성패나 재계의 순위 바뀜이 흥미로워서가 아니다. 재계 순위 5위 롯데의 현주소를 우리 경제의 밑바탕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는 중요한 변화의 단서로 읽어내야 하는 까닭이다. 잘 알다시피, 20여년 전 외환위기의 티저 영상은 19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의 주력 계열사 한보철강의 부도 장면으로 시작됐다. 두달 뒤엔 삼미(26위)가 무너졌다. 기아(8위)는 물론, 한때 2위 자리까지 올랐던 대우가 맞닥뜨린 운명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의 여파는 오래도록 이어지면서 중견급 재벌이라 할 30위권 안팎의 재계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고합(17위)·진로(22위)·해태(24위)·신호(25위)·뉴코아(27위)·거평(28위)…. 해체돼 사라진 ‘왕년 재벌’의 리스트는 길다.
외환위기가 중견급 재벌이라는 약한 고리부터 끊어냈다면, 재계 최상위 집단과 10위권 이하 집단 사이의 격차가 더 벌어지기 시작한 때는 그로부터 약 10년 뒤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 즈음이다. 지난 10여년간 10위권 안의 재계 순위 판도에서 그다지 변화를 찾기 힘든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2020년대. 포스트코로나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전세계를 집어삼킨 바이러스는 우리 경제의 지도를 또 어떻게 바꿔놓을까. 전체 재벌 집단 경제력의 총합이 커지는 것만큼이나, 아마도 더 적은 소수의 재벌 집단 손에 파이의 몫이 집중되는 흐름은 한층 강화될 가능성이 현재로선 높아 보인다. 5위의 운명이 궁금한 진짜 이유다.
우리 경제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재벌 세상’에서 ‘10대 재벌 시대’를 지나 ‘빅4 체제’로 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고 하면 너무 심한 과장과 비약일까? 물론 무턱대고 선악의 잣대부터 들이밀 일도, 차세대 산업의 흐름을 한발 앞서 챙긴 최소한의 공조차 깡그리 무시할 일도 아니다. 다만 그 의미만은 찬찬히 짚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우선, 롯데의 부진은 내수기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탄탄한 내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 경제 현실의 거울상이다. ‘결국엔 수출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의 뒷맛은 씁쓸하다.
무엇보다 포트폴리오의 관점에서 우리 경제 전체로는 불안정성이 외려 커졌다고 봐야 옳다. 특정 업종·산업에 속한 극소수 재벌 대기업의 성적표에 우리 경제 전체의 명암이 오롯이 좌지우지될 수 있어서다. 경제의 리스크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는 셈이다. 하물며 지배구조 개선 과제가 남아 있고 건강한 시장경제 질서가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라면.
자칭 시장주의자라는 사람일수록 ‘혁신의 경제학’을 설파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낸다. 자본주의 역동성의 비밀은 성공한 기업도 ‘발밑에서 부서지는’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80년 전 슘페터의 깨우침이 2020년 한국 사회에도 타당하다면, 극소수 경제주체가 우리 경제의 리스크를 키우는 현실은 역동성 저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재벌 집중만큼이나 ‘재벌 내’ 집중도 문제다. 양극화 추세를 심각하게 다뤄야 하듯 ‘재벌 내’ 양극화 현상도 눈여겨봐야 하는 또 하나의 숙제다.
morg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