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윤ㅣ국제부장
미국은 코로나19 최다 확진국이다. 동시에 백신 개발 능력이 있는 제약회사와 백신 개발에 쏟아부을 예산을 가진 나라다. 코로나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길은 백신 개발밖에 없어 보였다. 트럼프는 티에프 구성과 예산 배정을 결정하고, 책임자들을 닦달하며 우격다짐으로 백신 개발을 독촉했다. 대선 직후 백신 개발이 발표되는 바람에 재선엔 도움이 못 됐지만, 아무튼 트럼프는 대선 캠페인 내내 ‘백신 정치’를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마저 21일(현지시각) “(트럼프) 행정부가 ‘초고속 작전’을 순조롭게 실행에 옮기는 등 어느 정도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다”며 다른 건 몰라도 백신 개발만큼은 트럼프를 높이 샀다.
바이든 자신도 이날 차기 행정부 수반으로서 중요한 ‘백신 정치’를 했다. 자신의 코로나 백신 접종 장면을 ‘쇼’처럼 미 전역에 생중계했는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전문가들은 ‘백신 수용도’를 정부와 제약회사에 대한 ‘신뢰 수준’으로 설명한다. 퓨리서치센터가 6일 발표한 결과를 보면 백인(61%), 히스패닉(63%), 아시아계(83%)의 백신 수용도가 그나마 높은 편이고 흑인은 그 비율이 42%에 그쳤다. 특히 흑인의 백신 거부감은 정부가 자초한 ‘보건의료 불신’ 탓이어서, ‘백신의 안전성’을 설득하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미 공중보건국(USPHS)은 1932~72년 ‘터스키기 실험’으로 흑인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보건당국은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의 흑인 남성 600명을 대상으로, 매독을 치료하지 않을 때 현상을 실험했다. 1947년부터는 페니실린이 안전한 매독 치료제로 쓰였지만, 당국은 피실험자들에게 페니실린을 처방하지 않고 그저 관찰했다. 그들 중 일부는 숨졌고, 그들의 가족도 감염됐다.
미국은 여성의 백신 접종 수용도도 낮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3일 발표한 결과를 보면, 남성 69%가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겠다는 반면, 여성은 그 비율이 51%다. 뉴욕의 브랜드 전략가인 아와 마다위는 <가디언>에 “여성의 건강은 주류 의학에서 종종 무시됐고, 여성 질환이 남성 질환에 비해 덜 연구되는 경향도 있다”며 여성이 보건당국과 의료산업을 덜 신뢰하는 맥락을 짚었다. 그는 ‘발기부전 남성이 19%이고 생리전증후군 여성이 90%인데, 발기부전 연구가 생리전증후군 연구보다 5배 많다’는 것 등을 사례로 언급했다. 심지어 미 식품의약국(FDA)은 1993년까지 임상시험 때 여성을 포함하도록 권고하지도 않았다. 명분은 여성 보호였으나, 여성의 질환 및 약의 효능과 안전성에 관한 무관심이기도 했다.
미 정부가 코로나 최대 피해국이자 의료강국으로, 또 국민 상당수에게 보건의료 불신을 심어준 역사적 과오의 계승자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백신의 개발과 접종’을 독려할 정치적 책임이 있다면,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방역이라는 목표는 같겠지만, 팬데믹 상황과 경제 규모, 백신 수용도 등 형편에 따라 정부의 역할과 책임, 그에 따른 정책도 다를 것이다.
한국의 경우 선제적인 백신 개발은 힘들지만 국내총생산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 10위로 백신 구매력은 있다. 특히 입소스가 10월 주요 15개국 성인 1만8000명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 의사를 물었더니, 한국(83%)은 인도(87%)와 중국(85%)에 이어 세번째로 많이 “맞겠다”는 적극성을 보였다. 한국은 코로나와 백신 음모론이 만연해 있는 프랑스(54%)는 물론, 사회 신뢰 수준이 높은 독일(69%)과 일본(69%)보다도 백신 수용도가 높다.
한국 정부가 백신 확보를 서두르지 않은 데 대한 비판이 거세다. 청와대는 22일 “백신의 정치화를 중단하라”고 반박했지만, 팬데믹 시대에 백신이 아니면 무엇이 정치의 대상인지 자못 의아해진다. 팬데믹이 단기간에 호전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고, 백신 구매력이 있으며, 백신을 맞겠다는 국민이 절대다수다. 그간 방역 성공에 고무돼온 정부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겠으나, 우리의 이런 ‘조건’을 이해하고, 인력과 예산을 배치하고, 백신 확보 총력전을 상세히 알려 국민의 불안을 달래는 ‘백신 정치’를 정부가 먼저 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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