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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는 역사다] 미국혁명의 첫번째 열사 / 김태권

등록 2021-03-04 18:43수정 2021-03-05 02:07

크리스퍼스 애턱스 (1723년께~1770년)
크리스퍼스 애턱스 (1723년께~1770년)

살아생전의 일은 잘 모른다. 아버지는 흑인, 어머니는 아메리카 원주민. 그 역시 노예였다. 젊은 시절에 자유를 찾아 탈출한 것 같다. 탈출 노예 광고에 실렸다고 한다. 아마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고래잡이배를 탔으리라고 한다. 뱃사람으로 어찌 살았는지 역시 우리는 모른다.

보스턴은 항구도시였다. 1770년 3월5일에 뱃사람이랑 영국 군인이랑 시비가 붙었다. 그때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 정부를 고까워하던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병사들은 당황했다. 무장도 안 한 민간인에게 총질을 했다. 이른바 보스턴 학살사건이다.

시위대 맨 앞줄에 애턱스가 있었다. 가슴 복판에 두 발을 맞고 숨졌다. 무슨 생각으로 앞장을 섰는지는 수수께끼다. 산 채로 체포되더라도 도망 노예임이 들통날 텐데 말이다. 아무려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란 앞뒤 재지 않는 이런 결기일 것이다. 잔걱정 많은 지식인은 언제나 빚만 지는 신세일밖에.

미국에서는 크리스퍼스 애턱스를 독립혁명 최초의 열사로 기억한다. 1775년에 독립전쟁이 터지자 5천명의 흑인이 미국 편을 들어 영국에 맞섰다. 얼마 후 북부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연방정부는 노예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자 남부의 노예 주인들은 노예의 수를 늘린답시고 어린 노예를 강간하기까지 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벌어진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흑인 노예 문제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차별은 남았다. “어차피 백인의 나라가 됐는데 왜 아깝게 목숨을 바쳤느냐”는 한 맺힌 시선도 있다. 반면 마틴 루서 킹은 1964년에 애턱스가 “혁명 과정에서 가장 먼저 피를 흘린 미국인”이라고 썼다. 흑인생명소중 운동 때 애턱스의 이름은 자주 입에 올랐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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