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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끝내 이기리라!

등록 2021-04-28 14:55수정 2021-04-29 02:36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양곤 시민들이 지난 27일 양곤의 산차웅에서 세 손가락을 펼친 채 행진하고 있다. 양곤/AFP 연합뉴스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양곤 시민들이 지난 27일 양곤의 산차웅에서 세 손가락을 펼친 채 행진하고 있다. 양곤/AFP 연합뉴스

|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미얀마 양곤대학 교수가 소식을 전해왔다. 군부 쿠데타에 반대해서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왔다고. 다시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교수들 대부분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탄압이 심해지고 있지만 끝까지 싸워서 이기겠다고, 함께해달라고 호소했다. 낯익은 교수들의 비장한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의 급여를 포기한 것은 물론 해직의 위험까지 감수한 그들의 험난한 앞날이 그려져 마음이 먹먹했다.

2013년 봄, 그들과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미얀마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을 추진하고자 양곤대학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파트너로 일할 현지 교수들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1988년 민주화투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군부가 대학 캠퍼스에 학생과 외부인 출입을 금지시킨 때문이었다. 방문 신청을 하고 일주일을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허가를 받았다. 군사독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지만, 그래도 조금씩 문민정부로의 전환이 시작되던 시기라 그나마 가능했다. 대학 정문에서 사복군인들이 삼엄한 눈초리로 심문을 했다.

인적이 끊겨 텅 빈 캠퍼스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우거진 수풀 사이로 들개가 어슬렁거렸다. 대도시 양곤 중심가에 이렇게 너른 황폐한 공간이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수십년 돌보지 않아 퇴락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두컴컴한 현관을 지나 긴 복도 양편 교실들은 모두 닫혀 있고, 한구석 교무실에 교수와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유폐되었던 사람들이 구조대를 만난 듯 우리를 반겼다. 옛날 세미나실로 썼다던 큰 방에는 거미줄과 먼지가 자욱했다. 벽장을 닦아보니 고풍스러운 티크 책장이 번쩍이는 자태를 드러냈다. 부옇게 흐린 유리장 속에는 여러 언어권의 고전 서적들이 빼곡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 <레이더스>의 한 장면 같았다.

양곤대학의 전신인 랑군대학은 동남아시아 최고의 명문 대학이었다. 버마의 영웅 아웅산과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를 배출한 대학이고,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가 부러워했었다는 국제적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인권문제에 비판적인 미국이나 유럽 대학과의 교류를 끊고 대신 일본 쪽으로만 소수의 유학생을 보냈다. 학생 시위가 두려워 캠퍼스 출입을 막고, 남자 교수들의 저항을 경계해서 인문사회 전공 교수는 여성만 남겨두었다. 바로 그 교수들이 피폐한 대학을 되살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양곤 이외에 만달레이대학 등 다른 대학들 사정도 비슷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 부산대, 전남대 같은 곳들이다. 이렇게 대학에서 학생들을 내쫓고 학문을 억압한 나라가 제대로 될까? 한국에 쌀을 원조해주던 버마는 세계 최빈국 미얀마가 되었다.

자칫 한국도 그 길을 갈 뻔했다. 대학 캠퍼스에 군인들이 쳐들어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까지 때려서 내쫓고 학교 정문을 총 든 군인들이 지키던 그런 때가 있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시끄러운 대학은 대포로 날려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장군들, 시위하는 시민들은 탱크로 밀어버려도 된다고 호언하던 경호실장의 모습은 오늘날 미얀마 군부 ‘타마도’ 권력자들과 겹친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나라일까 자신들의 권력일까? 권력을 쥐고 특권을 세습해온 그들은 겉으로는 큰소리치지만 속으로는 떨고 있을 것이다.

권력은 무력만으로 지킬 수 없다.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총 든 군인들 앞에 선 미얀마 시민들의 세 손가락이 터무니없이 미약한 몸짓인 듯해도,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을 수백, 수천명 죽여야 유지되는 권력은 결국 분열되고 와해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신독재를 끝내는 궁정동의 총성이 울렸다. 1980년 5월 무자비한 진압에 맞선 광주 시민들의 피 때문에 1987년 6월 서울에는 탱크가 들어오지 못했다. 2016년 가을 광화문에서 물대포에 쓰러진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그해 겨울 수백만 촛불 위로는 물 한 방울 쏘지 못했다.

2021년 4월, 거리로 나선 미얀마 시민들은 한국처럼 민주화된 미래를 꿈꾸며 저항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여기서 꺾이면 다시 암울한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유폐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무자비한 권력에 맞서고 있다. 한국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미얀마 무기 수출을 중단했다. 기업도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군부 편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8년 전, 민주화의 봄바람에 조금씩 기지개를 켜던 양곤 거리에서 활짝 웃으며 ‘강남스타일’ 춤을 추던 어린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그 아이들이 저항의 선봉에 섰다. 미얀마 거리에서 시민들이 외치고 있다. “아웅야미!” 끝내 이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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