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향 문화부장
손이 빨라야 갈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한 초밥집 얘기다. 30대 직장인 문아무개씨는 지난달 20일 오후 5시, 결연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엔 꼭 성공하리라!’ 하지만 그날도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식당 예약 버튼을 계속 클릭했지만, 자신보다 손이 빠른 이들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10개월째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그는 다음달 20일을 학수고대한다고 했다. 여의도의 그 초밥집은 한달에 딱 한번만 예약을 받는다. 그것도 오후 5시 정각에 말이다. 한달치 예약이 1시간도 안 돼 마감된다. ‘이 집 예약에 성공하는 법’이 인터넷에 돌 정도다. 주인은 번거로운 대면 예약 대신 비대면 서비스 기술을 선택했다. 일상에 스며든 정보기술(IT)은 삶의 패턴을 바꾸고 있다.
비단 외식업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최근 인기가 급상승 중인 남성 듀오 매드몬스터(이하 매몬) 현상을 보면, 브이아르(VR·가상현실), 에이아이(AI·인공지능) 등을 포함한 정보기술의 발달이 대중문화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는 걸 직감한다. 매몬의 멤버는 탄과 제이호. 이들의 업적은 방탄소년단과 쌍벽을 이룬다. 전세계 60억명이 팬이다. 제이호는 유학파 음악천재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코미디언 곽범과 이창호가 만든 가상세계고, 대중은 이들이 만든 세계관에 푹 빠졌다는 게 실제 얘기다.
지난해 데뷔한 아이돌 에스파(aespa)는 멤버가 4명이기도 하고 8명이기도 하다. 아바타(avatar)와 익스피리언스(experience)의 첫번째 알파벳을 합친 게 이들 이름의 첫 글자다. 현실에 실제 존재하는 인간 4명과 그들의 아바타 4명, 총 8명이 에스파의 멤버다. 가상세계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아이돌이다. 데뷔곡 ‘블랙맘바’ 가사는 현실세계 멤버 4명과 가상세계 아바타 4명의 연결을 방해하는 악당을 이기겠다는 내용이다.
1990년대 말 탄생한 사이버 가수 아담이 퍼뜩 떠오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아담이 인간 수작업의 결정체였다면 에스파의 아바타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메타버스(가상현실) 전문가인 김상균 강원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머신 러닝과 딥 러닝을 통해 지능을 갖게 된 에스파는 러닝이 지속될수록 스스로 판단하고 사고할 수 있는 개체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분신과는 다르다는 소리다. 분신은 원형과 종속 관계지만, 가상세계 아바타는 탄생과 동시에 원형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 생존 체계를 구축한다. 인간 에스파보다 가상인물 에스파가 더 주목받게 될지 모른다.
싱어송라이터 겸 디제이 김래아의 탄생도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1만이 넘은 김래아는 곧 새 음반을 출시할 예정이다. 영국에서 공부하다 코로나19 사태로 귀국한 그는 거제도 구조라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디자이너 엄마와 개발자 아빠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광팬이다. 영국 유학 초기 외로움에 엘피(LP) 가게를 자주 찾다가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매몬처럼 이 이야기도 엘지전자가 창조한 김래아의 세계관이다.
이쯤 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대중문화는 시대의 방향타다. 열광하는 스타가 사실은 가상의 존재라면? 점차 세상이 그런 존재들로 넘쳐난다면? 2009년 개봉한 영화 <써로게이트>는 아바타를 둘러싼 범죄가 소재다.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한 수많은 에스에프 작가들이 경고하듯 그려낸 미래가 이미 코앞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포에 앞서 설레는 마음이 드는 건 ‘초밥집’의 흥행 때문이다. 흥행 요인은 식당의 근본인 맛이다. 거기에 기술이 합쳐져 소문이란 양념이 얹어졌기 때문에 대박 행진을 이어가는 것이다. 문화 콘텐츠의 본질도 다를 바 없다. 전문가들은 가상인물을 내세운 문화 콘텐츠의 성공 여부는 인간의 서사를 얼마나 잘 담아내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기술의 발달도 결국 우리 삶의 성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설렐 수밖에! 초밥집 예약이 성공하는 날 문씨는 매몬 노래를 흥얼거리리라. 그도 매몬의 팬이다.
mh@hani.co.kr
엘지전자가 창조한 김래아. 출처 김래아 인스타그램
에스파. S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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