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0월29일 오후 서울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출발해 용산 대통령실을 지나 서울광장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지난달 29일 정부·여당의 외면 속에 이태원 참사 1주기 행사가 치러진 가운데, 국제기구도 유가족들과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유엔의 권고를 성실히 이행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이미 대대적인 조사와 수사가 이뤄졌다는 기존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 규약)은 생명권과 평등권, 신체의 자유, 양심·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 자유권 규약을 비준한 이래, 정기적으로 자유권 규약 이행에 대한 심의를 받아왔다.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대한민국에 대한 5차 심의 결과를 지난 3일 발표했는데,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생명권 이행 과제가 최종 견해에 포함됐다. 위원회는 “사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전면적이고 독립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효과적인 구제가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진실을 규명할 독립적이고 공정한 기구를 설립할 것, 고위직을 포함한 책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할 것, 유가족에 대한 적절한 배상을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 등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이런 유엔의 권고 내용은 이미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안에 들어가 있다. 독립적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를 구성하고 필요시 특검 임명을 위한 국회 의결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만 넘었을 뿐 여당 반대로 석달째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법무부는 이번에도 참사 직후부터 경찰 특별수사본부 수사와 검찰 수사, 국회 국정조사 등이 이루어졌고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의례적인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유엔의 권고 내용을 반박하며,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유엔은 정부가 추모집회에서 과도한 공권력을 사용하는 등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노력을 방해한 것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국제사회도 주목하고 있는 문제를 언제까지 외면만 할 것인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는 식의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오늘도 유가족들은 참사 발생에 왜 대비하지 못했는지, 참사 당시 구조 활동이 어떤 이유로 지체됐는지, 책임자 처벌은 왜 이뤄지지 않고 있는지 간절히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