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50)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비주류’ 담당이다. 1971년 전북 장수군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나 올해 민주당 주자로 대선 경선에 도전할 때까지 그의 50년 생애에는 ‘비주류’라는 딱지가 줄곧 따라붙었다.
“크면서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닌 갖춘 것 없는 평범한 집안이고 조상 중에도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는 그저 그런 내력의 가문의 소속임을 금방 깨달았다.”(<박용진의 정치혁명>)
그는 경찰인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다고 밝혔다. 다른 대선주자급이 으레 그렇듯 등골 빠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주경야독으로 자수성가를 했다거나 엘리트 집안의 대단한 부모형제 영향 속에서 전문가가 되어 자연스럽게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스토리’가 그에겐 없다. 운동권 대학생 시절부터 몸담았던 20년간의 진보정당 활동을 끝내고 2011년 ‘주류’인 민주통합당의 일원이 됐지만 그 안에서도 그는 여전히 ‘비주류’로 통했다.
그의 진짜 스토리는 2016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의정활동 6년 동안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쉽게 건드리지 못했던 성역에 메스를 들이댔다.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 차명자금 4조5천억원에 대한 과징금 부과와 급발진으로 인한 현대자동차 대규모 리콜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유치원 3법’은 국회의원 박용진의 가장 빛나는 성과다.
이를 바탕으로 대선에 도전한 그에게는 ‘빚’이 없다. 2016년 총선에서 51%의 득표율로 서울 강북을에서 당선되며 ‘주류 민주당’에 안착했지만 그는 “유력자의 낙점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말을 하고 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가석방이나 언론중재법에 대해 그가 다른 민주당 대선주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소신 발언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난 7월11일 혈혈단신으로 민주당 예비경선(컷오프)을 통과했다. 거친 황무지에 씨앗을 뿌려놓고 혼자서 열심히 거름을 뿌리던 그의 밭에 드디어 작은 새싹이 하나 돋아난 것이다. 아직 작고 여린 새싹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는 활엽수로 성장할 수 있을까.
기득권과 맞서는 개혁성…좌고우면하지 않는 과감함
‘새싹’ 박용진 의원은 여야 주요 대선주자 가운데 가장 젊다. 민주당 대선 경선 토론회에서 그는 스스로 “가장 젊고 가장 잘생긴 후보”라고 소개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로 상징되는 ‘세대교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유일한 후보인 셈이다. 젊은 대선주자로서 그가 내놓은 공약들도 참신하면서 논쟁적이다.
그가 공약한 모병제와 남녀평등복무제는 새로운 병역제도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이대남’(20대 남성)의 표심을 잡기 위해 젠더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오랜 진보정당 활동 경력을 가진 그가 법인세·소득세 감세를 주요 공약으로 들고나온 것도 합리적·실용적이라는 평가와 코로나19로 재정 지출을 늘려야 하는 현실과 어긋난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논쟁적인 주제들이지만 내용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간 그가 보여온 정치 행보를 통해서 진정성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박 의원은 삼성전자 등 재벌 개혁을 주장해온 과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법인세 감세 주장에 설득력이 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도 “박용진 3법 등 굵직한 정책 역량을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민주당, ‘올드 진보’와의 차별화된 포지션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과감한 행보를 보이는 것도 강점이다. 그는 최근 법무부가 이재용 부회장을 가석방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재벌 총수에 대한 0.1% 특혜 가석방은 공정한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 가석방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내놓은 소신 발언이다. 민주당이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언론중재법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한 감시·견제와 비판이라는 언론의 기능이 약화돼선 안 된다”며 민주당 대선주자 가운데 유일하게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이에 대해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는 “당내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중도 및 보수 성향 유권자들로부터 합리적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빚’이 없어 자유롭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세력’도 없다는 뜻이다. 거물급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수십명의 현역 의원으로 캠프를 꾸린 것과 달리 박용진 캠프에는 ‘금배지’가 한명도 없다. 줄세우기와 무리짓기가 공천권 등 이권을 매개로 한 ‘당내 정치’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줄을 서는’ 모든 정치인이 꼭 ‘이권’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단단한 철학과 소신을 갖고 있는 정치인에겐 ‘권력’이 없어도 사람이 붙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의 곁에 사람이 없다는 점은 정치인으로서 주요한 덕목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박 의원이 토론하는 것을 보면서 나르시시스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나치게 공격적인 모습이 많이 노출되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잃게 되고 자기 세력도 구축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른 경쟁 후보들에 견줘 인지도가 낮고 핵심 지지층이 부족하다는 점도 그가 극복해야 할 약점이다. 한귀영 연구위원은 “‘박용진 현상’을 떠받쳐줄 만한 핵심 지지층이 보이지 않는다”며 “작지만 강력한 핵심 지지층이 있어야 확산 가능성이 있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세력 없이 출발한 노무현 후보에겐 ‘노사모’라는 핵심 지지층이 있었고 여기서 발원한 ‘노풍’이 경선 역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박 의원에겐 역전의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난 5월 출마 선언 뒤 지지율 추이를 보면,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그는 여야 대선주자를 종합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0%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당 대선주자만을 대상으로 한 최근 조사에서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을 제치고 3위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긴 하다. 8월 4주차에 리얼미터가 조사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적합도’에서 박 의원은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에 이어 지지율 7.1%를 얻어 6.4%의 추 전 장관과 경합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선택만 떼어놓고 보면, 박 의원(1.2%)은 추 전 장관(6%)과 정 전 총리(3.4%)에 뒤진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투표 결과로 당락이 좌우되는 경선에서 그만큼 불리하다는 의미다.
민주당 대선후보가 결정되는 10월10일까지 약 한달간 그에게 남은 기회는 무엇이 있을까. 영남 역차별 논쟁,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찬반 투표, 조폭 사진 논란, 무료 변론 논쟁까지 이른바 ‘명낙대전’이라 불리는 1·2위 주자 간 다툼이 격화되며 생기는 피로감이 후발주자에겐 틈을 비집고 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박용진 의원은 최근 이재명-이낙연 캠프 간에 조폭 사진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자 “정치인은 어디 가서든 사진 촬영 요청을 하면 응해준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다. 다른 주자들의 근거 없고 무리한 공세의 문제점을 짚어내며 유권자들의 피로감을 덜어주는 역할에 나선 것이다. 성한용 선임기자는 “이재명·이낙연 후보 등 선두권 주자들의 갈등이 격화해 당원과 지지자들의 외면을 받을 경우 박 의원이 대안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전망했다.
무엇보다 젊은 박용진 의원에게는 이번 대선 출마가 차기에 대한 가능성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대통령이 재수·삼수 끝에 당선에 성공했듯이 박 의원에겐 이번 경선 자체가 여권 지지자들에게 대선주자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윤태곤 실장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미래를 생각할 때는 박용진 정도 되는 씨앗은 좀 키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한용 선임기자도 “민주당 경선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면 차차기 대선주자나 정치 지도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고 내다봤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박용진 의원은 친문 강성 지지자들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폭탄’ 공격의 단골 대상이다. 이러한 행보는 중도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손해가 더 커 보인다. 그는 지난달 20일 노동계와의 간담회에서 “요즘 민주노총 등에서 자꾸 사회적 의제에 대한 반대만 하고 투쟁만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 사회적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발언들은 진보정당 출신이면서도 노동·진보 진영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귀영 연구위원은 “진보·보수, 기업·노동 관계없이 ‘모두까기’를 하면서 후련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도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서 핵심 지지층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운동장을 넓게 쓰고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줄 아는 축구가 팀을 승리로 이끌고, 진영논리에 갇히지 않고 폭넓은 정치적 다양함을 만들어나가는 정치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박용진의 정치혁명>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지만 ‘운동장 넓게 쓰기’ 소신이 아직까지는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