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왼쪽 셋째) 통일부 장관이 지난 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다른 국무위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다고 난리다. 통일운동이나 평화운동 시민단체에서는 활동가가 부족하다 하고, 분단 및 북한 관련 연구소나 학과에서는 연구자와 학생 수가 급감해 위기감이 상당하다. 통일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외면당한 것은 오래된 일이고 한때 대안으로 부상했던 평화교육도 지지부진한 듯하다. 언론계 상황도 비슷하다. 북한에 대한 전문지식을 겸비한 언론인이 극소수인 까닭에 이미 관련 보도 대부분은 수박 겉핥기가 된 지 오래다. 과히 ‘분단 인더스트리’의 붕괴라 할 만하다.
본래 ‘인더스트리’는 라틴어의 ‘인두스트리아’(indust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근면, 활동, 열정 등을 뜻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서 ‘체계적인 작업’이라는 뜻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근래에는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으로 협소하게 쓰는 경향이 있지만, 본래 뜻은 특정한 활동의 체계화된 형태를 뜻한다. 분단된 국가인 남한에서 분단·통일·평화 분야는 학계, 언론·교육·경제계 그리고 정부와 비정부기관이 유기적으로 얽혀 작동하는 하나의 체계로 작동해왔기에 ‘분단 인더스트리’로 정의할 수 있다. 탈냉전 이후에 남한 내 ‘분단 인더스트리’는 분단 및 통일 관련 인력·담론·정책·재원을 생산해왔으며, 재생산 구조를 갖춘 나름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지난 30년간 힘겹게 지속된 ‘분단 인더스트리’가 붕괴하고 있다. 이것이 ‘평화 인더스트리’로 전환됐다면 환영할 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붕괴된 자리에는 구시대의 유물인 절멸의 언어와 형해화된 이념이 회귀하고 있다.
권위주의 정부 시기에는 굳이 ‘인더스트리’로 칭할 만한 다양한 주체들의 활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국가안전기획부와 국방부 같은 안보기관의 일방적 폭주만이 있었다. 하지만 냉전이 탈냉전으로 전환되고 남한의 민주화가 진행된 199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분단·통일·평화 분야에 ‘체계적인 활동’ 구조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물론 남북한 정부 사이의 합의가 기여한 바가 컸다.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한을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상대방 체제 인정, 남북 불가침과 남북 교류·협력 등의 원칙에 합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탈냉전에 발맞춰 남북은 서로 인정하고 교류·협력에 나서기로 하면서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접촉을 통한 통일’이라는 지향으로 전환했다.
변화는 정부기관에서도 확인된다.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국토통일원을 1990년 부총리급이 이끄는 통일원으로 격상했고, 1998년에는 현재의 통일부로 전환됐다.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남북 교류·협력은 금강산 관광사업이나 개성공단 사업 등으로 구체화됐다. 물론 이 시기에 북한의 핵실험으로 군사적 갈등이 상존했지만, 큰 흐름에서 남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로서 교류와 협력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다.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의 식량난을 기점으로 시민사회의 인도·교류·협력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됐고, 그만큼 많은 활동가와 전문가가 몰려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 이 분야에 새로운 인력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몇몇 대학에서 북한 관련 전공을 학부 혹은 대학원에 개설하기도 했다. 통일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교사의 수도 늘어났으며, 북한에 대해 제대로 된 보도를 하겠다며 공부에 매진하는 언론인도 많아졌다. 정부 관계자, 시민사회 활동가, 학자 및 전문가, 교사, 언론인, 거기에 남북 경협 사업에 나선 경제인까지 분단을 지속적으로 문제시하면서 나름의 극복 방안에 대한 담론, 정책, 실천전략을 만들어냈다. 군사안보라는 측면에서 남북관계의 긴장은 상존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1990년대 이래로 남북 사이의 교류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분단 인더스트리’가 활발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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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기는 외부적 충격과 내부적 관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발생했다. 우선 외부적 충격은 북-미 관계 악화, 북한의 핵 능력 강화, 대북 국제 제재, 그리고 최근의 미-중 전략 경쟁까지 다양하다. 남북 교류·협력 패러다임이라는 관성에 익숙했던 ‘분단 인더스트리’는 지속되는 외부 충격에 뾰족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버티는 것에 에너지를 쏟아붓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한 사회의 지형 변화에 적극 대응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새로운 사회윤리로 안착하면서 분단과 통일 문제는 이미 시민들의 관심에서 벗어났음에도 다시금 교류·협력이 시작되면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수가 급감해도, 대학에 생긴 북한 관련 학과가 하나둘씩 문을 닫아도, 대북 경협에 나서는 기업이 자취를 감추는 상황에도,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희망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18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될 때 아주 잠깐이지만 다시금 ‘분단 인더스트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담론장이 활발해졌으며, 다양한 정책적 상상이 쏟아졌다. 북한이 한국 경제에 남은 유일한 ‘블루오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제인들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당 기간 멈춰버린 남북 교류·협력에 기반을 둔 ‘분단 인더스트리’는 급변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할 역량도, 자원도, 사람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평화프로세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못했을뿐더러 그것이 좌절된 이후에도 새로운 전략이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꿈처럼 짧은 해빙기가 막을 내리자 ‘분단 인더스트리’의 담론과 정책의 현주소가 더욱 명확해졌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회적 공명도 구체적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처절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기후위기와 기술 발전이라는 인류 문명의 대전환이 도래한 지금,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 없이는 한반도 평화로 한 치도 나아가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은 통일부가 더 이상 ‘대북지원부’가 돼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새로 임명된 통일부 장관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해 향후 통일부의 역할을 북한 정보 분석과 인권에 집중하겠다고 공언했다. 몇몇 끈질긴 활동가, 학자, 언론인이 겨우 명맥을 유지해온 탈냉전 시기의 ‘분단 인더스트리’가 완전히 파괴됐음을 알리는 최종선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붕괴와 해체에서 희망을 읽는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그것에 걸맞은 새로운 체계와 생태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극우적 성격을 숨기지 않기로 한 정부는 과거로 회귀를 선언했지만, 적어도 시민사회, 학자와 전문가, 시민들은 미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당연시 여겨왔던 모든 것에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지금은 우리 안의 관성을 벗어던지고 ‘분단 인더스트리’의 폐허를 직시해야 한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것은 파괴에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에식스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공회대, 싱가포르국립대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 사회와 탈분단 문화를 연구하며, ‘갈라진 마음들’ 등 다수 학술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