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 상에서 북한 경비병들과 유엔사측 경비병들의 대화 (1978). 남북회담본부 누리집 갈무리
7월31일 오전 10시부터 판문점 남쪽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남북 군 당국자가 마주 앉았습니다. 이날 열린 9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은 4월27일 남북 정상이 만나 합의한 판문점 선언 이후 열린 두번째 장성급 군사회담이었습니다. 지난 6월14일에 있었던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이 판문점 선언의 군사 분야 합의 내용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주고 받았다면, 그로부터 47일만에 열린 이날 회담에서 남북은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이날 남쪽 수석대표를 맡은 김도균 국방부 대북정책관(육군 소장)은 회담을 마친 뒤 남북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비무장지대 내 남북 공동 유해발굴, 비무장지대내 상호 시범적 지피(GP·감시초소) 철수, 서해 해상 적대행위 중지 등에 대해 협의를 진행했다”며 “남과 북은 이 조치들을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틀에서 견해 일치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네 가지 사항에 대해서 남북이 구체적인 이행시기나 방법까지 확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합의’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남북이 이 의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은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이 서로의 의지를 확인한 만큼 구체적인 이행계획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한겨레> ‘더(the) 친절한 기자들’에서는 7·31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이 협의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짚어보겠습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 갈무리.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이 ‘비무장화’ 되면 어떤 모습일까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에 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4·27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공동경비구역은 한국전쟁 당시 정전회담이 열리고, 실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입니다. 공동경비구역은 동서 800여m, 남북 400여m 크기로, 모양은 장방형(사각형)입니다. 올해 다양한 회담이 열리는 남쪽 평화의 집과 북쪽 통일각, 남북연락사무소가 있는 남쪽 자유의 집과 북쪽 판문각도 모두 이 안에 있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당시만 하더라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현재보다 훨씬 평화로웠다고 전해집니다. 유엔군사령부, 북한군, 중공군이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각종 회담 등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협력’을 위한 공간이었던 만큼 정전협정 체결 당사국의 군인들은 이 구역을 함께 관리했는데요. 병력이 각각 장교 5명, 병사 3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경비 병력은 총알이 한 발씩만 나가는 비자동소총이나 권총을 딱 한 정씩만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군사적으로 대치할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병력으로 낮은 수준의 무장만 했다는 얘기죠. 문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었기 때문에 이 공간에는 군사분계선이 없었고, 군인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모습. 남북회담본부 누리집 갈무리
이런 분위기는 1976년 8월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하면서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살해당한 사건이었는데요. 이 일을 계기로 공동경비구역을 가로 질러 물리적으로 군사분계선이 표시됐습니다. 북쪽 군인과 남쪽 군인 그리고 유엔군은 각자 자기 구역을 벗어나 상대방의 구역으로 갈 수 없게 됐습니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이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대치가 해를 거듭할 수록 35명에 불과했던 병력은 배 이상 많아졌고, 무장의 수준도 과거와는 비교하기 어렵게 높아졌습니다.
만약 7·31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이 모두 공감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가 이뤄진다면, 그 모습은 일단 지금보다는 훨씬 평화로웠던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와 비슷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만큼은 군인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병력이나 무장 수준도 현격히 낮아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곳곳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평화와 협력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이동 중인 판문점의 북한 경비병. 1996년. 남북회담본부 누리집 갈무리
■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지피(GP·감시초소)를 철수한다고요?
남북 군 당국이 의견 일치를 본 ‘비무장지대 내 상호 시범적 감시초소 철수’는 얼핏 말이 참 어려운 것 같은데요. 큰 틀에서 보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동경비구역을 현재보다 평화롭던 과거로 돌리겠다는 취지입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당시만 하더라도 비무장지대(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각각 남쪽, 북쪽 2km 구간을 이르는 말)에는 ‘민사경찰’이라고 부르던 군인이 각각 1000명 정도만 머무르며 이 지역을 관리했습니다. 군인들은 이 곳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65년 동안의 정전체제는 이 공간을 비무장지대가 아닌 ‘무장지대’로 바꿔놨습니다.
현재 비무장지대에 있는 감시초소 수십 곳과 병력 수천 명은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국방부는 정확한 감시초소 수와 병력에 대해 보안상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만, 대략 남쪽 비무장지대에는 감시초소가 60여곳, 병력은 1800여명 정도라고 전해집니다. 북쪽에는 감시초소 160여곳에 병력이 1만여명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감시초소(GP·Guard Post)는 말 그대로 적을 감시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초소 안에는 기관총, 지름 3∼4cm짜리 유탄을 쏠 수 있는 발사기 등 중화기가 놓여져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아군을 지키는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은 상호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감시초소와 병력, 무기들을 경쟁적으로 늘려 나갔습니다.
남북 군 당국이 지난 7월31일 협의한대로 비무장지대 안 감시초소 시범 철수가 이뤄진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정부의 설명을 들어보면, 남북은 일단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감시초소들 가운데 서로 가까이 붙어있는 초소들부터 시범적으로 철수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시초소가 가까이 붙어있으면 서로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더 잘 보일텐데요. ‘적’의 움직임이 쉽게 눈에 띄니 자칫 작은 오해가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습니다. 정부가 감시초소 상호 시범 철수를 한다면 서로 가까이 붙어있는 초소들부터 빼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여나가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정부는 시범적으로 가까이 마주한 감시초소 한두 곳이라도 철수한 뒤, 점점 철수하는 초소 수를 늘려나가자는 입장입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비무장지대’가 감시초소 따윈 없는 텅 빈 공간이 될텐데요. 이 곳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공원 등으로 꾸민다면, 그때는 진짜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가 될 것입니다.
비무장지대 표지판을 설치하는 미군 병사들. 남북회담본부 누리집 갈무리
■ 남북 공동 유해 발굴…목숨 잃은 장병들 고향 돌아올까?
남북은 이날 회담에서 비무장지대에 있는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를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하자는 데에도 뜻을 같이 했습니다. 현재 비무장지대에는 남쪽 군인 1만여명이 묻혀 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 유해 발굴을 해보면 국군 외에도 16개국에서 온 국제연합군, 북한군, 중공군 모두가 발견될 것으로 보입니다.
군사분계선을 둘러싼 이곳 비무장지대에서는 남북, 그리고 국제연합군과 중공군이 1951년부터 2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고지를 뺏고, 또 뺏겼습니다. 이 시기, 계속 휴전회담이 열리던 중이었고 이때 조금이라도 상대를 더 공격해 ‘우리 땅’을 넓혀야 했습니다. 과거 전투가 치열했고, 또 잦았던 현재 비무장지대에서는 수 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약 남북이 비무장지대에서 공동으로 전사자 유해를 발굴한다면, 이 장병들은 6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유해발굴은 남북이 추진하기 가장 쉬운 인도적 협력일 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남쪽에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전문기관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있고, 북쪽도 이미 북-미 유해 공동발굴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기사: 68년간 북녘 땅 잠든 20살 송 일병, 언제쯤 집에 돌아오나)
남북 공동의 유해 발굴이 남-북-미 3자 공동 유해 발굴 추진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립니다. 이미 국방부는 지난 7월24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현안보고에서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동시에 이행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 남-북-미 공동 유해 발굴을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내놨습니다. 필요하다면 북한 지역에서 이뤄지는 북-미 사이의 유해 발굴에 남쪽이 참여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한 바 있습니다.
유해 발굴 작전을 하고 있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요원. 노지원 기자
■ 바다에서 불필요한 군사 충돌을 막는 법은?
31일 회담을 마친 뒤 김도균 수석대표는 브리핑에서 “서해해상의 사격훈련 중단문제나 또 함포·해안포의 포구 덮개 또는 포문들을 폐쇄하는, 이런 적대행위를 중지하자는 데 견해를 우선 일치”했다면서 “군사적긴장완화 및 신뢰구축, 또 서해해상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한 그런 조치들이 협의됐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남북이 서해에서 서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일단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해상 사격 연습을 조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다에서도 땅과 마찬가지고 다양한 훈련을 하는데, 상대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거나 긴장감을 높일 수 있는 기존 훈련 방식을 바꾼다는 얘깁니다. 상대를 향해, 또는 상대가 보이는 곳에서 훈련을 하지 않는 것 만으로도 불필요한 군사적 충돌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함포, 곧 배에 태운 대포나 해안에서 바다로 쏠 수 있는 해안포의 포구에 덮개를 씌우거나 포문을 닫으면 상대에게 ‘우리는 당신에게 대포를 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호를 줍니다.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죠. 포구에 씌워진 덮개가 오랫동안 걷히지 않는다면, 더이상 포를 사용할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