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4박6일의 동남아시아 순방을 마쳤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악화하는 신냉전의 길목에서 새 정부의 외교 전략을 펼쳐 보이는 중요한 무대였습니다. 하지만 순방 기간 내내 지속된 언론 통제 논란으로 빛이 바랬습니다.
[논썰] 전용기 거부 ‘한겨레’ 기자들과 언론통제, 또 떨어진 윤 지지율. 한겨레TV
전용기 탑승 거부한 ‘한겨레’, 우여곡절 겪어
<한겨레>는 대통령실이 <문화방송>(MBC)을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시킨 것이 “언론을 통제하려는 반민주주의적 결정”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전용기 탑승을 거부했습니다. 한겨레 기자들은 대통령 정상외교 취재에 더해 언론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또 하나의 짐을 진 채 순방 취재를 해야 했습니다.
대통령실은 전용기 탑승 배제를 두고 ‘취재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일 뿐 취재 방해는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민항기를 이용한 취재에는 많은 불편과 우여곡절이 따랐습니다.
출발 이틀을 앞두고 전용기 배제 발표가 나오는 바람에 한겨레 취재진은 급히 민항기 항공권을 구해야 했고 취재 일정을 맞추려면 전용기보다 하루 먼저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프놈펜에서 인도네시아 발리로 이동할 때는 직항 노선이 없어 싱가포르를 경유했습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의 비(B)20 서밋 기조연설 등 발리 일정 일부의 취재·보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통령실 경제수석의 브리핑과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의 김건희 여사 일정 관련 브리핑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한겨레 기자는 질문할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귀국길에도 민항기를 이용하다 보니 하루가 더 걸렸습니다. 결국 4박6일 순방 취재에 6박8일이 소요됐습니다.
[논썰] 전용기 거부 ‘한겨레’ 기자들과 언론통제, 또 떨어진 윤 지지율. 한겨레TV
언론사는 대통령 전용기에 비용 전액을 지불하고 탑승합니다. 전용기 탑승은 대통령이 언론에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언론에 부여된 책무이자 권리인 것입니다. 국내 기자 단체, 발행인 단체 등이 대통령실 행태를 일제히 비판하고 나선 이유입니다. 지난 15일에는 전세계 140여개국 180여개 매체가 가입한 세계 최대 언론인 단체인 국제기자연맹(IFJ)도 한국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연맹은 “한국은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수호해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며 “엠비시에 대한 윤 대통령의 계속된 공세는 위험한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국격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순방 외교를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덮어버린 셈입니다.
‘헌법 가치 훼손’을 ‘헌법 수호’라고 우기는 대통령
공직자는 늘 언론의 감시와 비판을 받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당연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라는 최고위 공직자가 자신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것은 자신의 공적 지위에 대한 인식조차 없음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어떻게 이런 치졸하고도 반헌법적인 조처를 할 수 있는지 황당할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18일 출근길 문답에서 또 궤변을 내놓았습니다. 엠비시 취재진의 전용기 탑승 배제 이유에 대해 “우리 국가 안보의 핵심축인 동맹관계를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고 아주 악의적인 그런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라며 “(이 결정이) 대통령의 헌법수호 책임의 일환으로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헌법적 가치인 언론 자유를 훼손해놓고 오히려 헌법 수호를 운운하는 게 뻔뻔합니다. 정작 비속어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자신의 과오는 반성하지 않고 거의 모든 매체가 일제히 보도한 내용을 ‘가짜뉴스’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언론 보도에 대해 정부가 심판관이 돼 가짜뉴스라고 딱지를 붙이고 이를 빌미로 취재·보도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언론 자유를 해치는 가장 위험한 행태입니다.
[논썰] 전용기 거부 ‘한겨레’ 기자들과 언론통제, 또 떨어진 윤 지지율. 한겨레TV
전용기 안에선 또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윤 대통령의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지난 14일 프놈펜에서 발리로 향하는 전용기에서 윤 대통령은 평소 친분이 있던 기자 2명만 따로 불러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해당 기자들과) 평소 인연이 있어서 이동 중에 편한 대화를 나눴을 뿐 취재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했습니다. ‘사적인 만남’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비판적 언론의 기자는 탑승을 못하게 하고 개인적으로 친한 기자와는 사사로운 대화나 나누고, 전용기라는 공적 공간과 취재기자단이라는 공적 존재를 지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대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18일 출근길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받자 “개인적인 일”이라고 답한 뒤 ‘전용기는 공적인 공간이지 않나’ 등의 질문이 거듭되자 “(다른 질문) 또 없으십니까”라며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정작 전용기 안에서 취재기자단을 상대로 순방 성과를 설명하는 공식 간담회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탑승하지 않은 <한겨레>, <엠비시>, <경향신문> 기자들을 배려해서 그런 것도 아닐 테고, 언론 기피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논썰] 전용기 거부 ‘한겨레’ 기자들과 언론통제, 또 떨어진 윤 지지율. 한겨레TV
외교 성과 있다면 왜 국민 앞에 설명하지 않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미, 한-중, 한-일 등 주요 정상회담 현장을 취재기자단에게 공개하지 않고 회담 이후 질의·응답 시간도 갖지 않은 점입니다. 통상적으로 주요 정상회담은 시작하는 앞부분을 언론에 공개합니다. 정상간 가벼운 인사와 대화, 현장의 분위기, 언론과의 짧은 질의·응답은 회담의 성격과 의미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취재기자단 대신 대통령실 소속 직원이 찍은 영상·사진만 공개됐습니다.
대통령실은 당사국간 협의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미-중 정상회담은 언론에 공개된 점에 비춰보면 미국·중국 등이 먼저 요청해서 그렇게 됐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은 귀국 뒤 17일 열린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와의 회담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순방 외교에서 정상회담 뒤 별도의 질의·응답 과정도 생략한 채 서면 보도자료만 내놓은 것도 무성의하기 그지없는 방식이었습니다. 국익이 걸린 중요한 정상 외교라면 그 결과를 상세히 설명하고 언론의 질문에도 답하는 게 정상적입니다. 성과가 있다면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보고하는 것을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보도자료만 달랑 내놓고 말았다니 도대체 취재기자단을 동행한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이동 시간이 촉박해 현지에서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할 수 없었다면 전용기 안에서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프놈펜에서 발리로 이동하기 직전 자국 기자들과 만나 13분 동안 한-일 정상회담 성과 등을 직접 설명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리에서 미-중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을 생중계로 진행한 것과도 대조됩니다.
[논썰] 전용기 거부 ‘한겨레’ 기자들과 언론통제, 또 떨어진 윤 지지율. 한겨레TV
논란만 낳은 ‘김건희 여사 독자 행보’ 홍보
대통령의 외교 성과에 대한 설명에는 인색했던 대통령실이 김건희 여사의 행보에 대한 홍보에는 성공한 듯합니다. 대통령실이 공개한 사진들이 순방 기간 연일 화제거리로 떠올랐습니다. 윤 대통령의 외교 성과보다 김 여사의 행보가 더 주목받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김 여사의 행보와 관련해서도 대통령실은 현장을 취재기자단에 공개하지 않고 사후 자료 제공만 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장면 위주로 공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연출된 인상도 받습니다.
특히 김 여사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캄보디아 아동과 함께 찍은 사진을 두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국제 구호개발과 인도적 지원 단체들의 연합체인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가 마련한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보면, ‘굶주리고 병든 아동의 이미지를 이용해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방식은 탈피해야 한다’, ‘아동과 보호자를 무기력한 수혜자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능동적 주체로 묘사해야 한다’ 등의 원칙이 제시돼 있습니다. 김 여사가 캄보디아 아동과 찍은 사진은 이런 원칙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국제개발협력 청년활동가 커뮤니티인 ‘공적인사적모임’은 이에 대해 “영부인 자신이 주 피사체로서 14살이나 된 청소년을 마치 갓난아기 끌어안듯 한 부자연스러운 자세의 사진은 가난의 맥락이 부재한 채 어둡고 비극적인 인상을 연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논썰] 전용기 거부 ‘한겨레’ 기자들과 언론통제, 또 떨어진 윤 지지율. 한겨레TV
국정 난맥상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순방 외교는 한-중, 한-일 정상외교의 물꼬를 다시 트는 등 의미있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러시아와 거리를 벌리며 미국·일본에 지나치게 편향적인 외교정책을 드러낸 것이 국익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이는 윤 대통령이 자유라는 가치를 강조해온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자유 등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 외교’를 강조하다 보면 유연하게 국익을 추구하는 ‘이익 외교’와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같은 외교 전략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장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자유의 깃발을 치켜드는 중대 외교 일정을 앞두고 왜 특정 언론사의 전용기 탑승 배제라는, 스스로 자유의 깃발에 먹칠하는 일을 저질렀을까요. 이것이야말로 현 정부의 국정 난맥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14∼16일 진행한 전국지표조사(NBS·신뢰 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결과, 엠비시 기자들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 결정에 대해선 65%가 ‘취재 기회를 박탈하는 부적절한 조치’라고 답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29%로 해당 조사에서 한달 반 만에 20%대로 다시 떨어졌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5~17일 실시한 여론조사(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에서도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지난주보다 1%포인트 하락한 29%를 기록했습니다.
기획·출연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