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헌법 조문에 대한민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관계를 완전히 차단·분리하려는 ‘대남 쇄국정책’ 속도를 높이고 있는 셈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지난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한 시정연설에서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이라 규정하고 “공화국(북)의 민족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밝혔다고 노동신문이 16일 보도했다. 최고인민회의는 남쪽의 정기국회에 해당한다.
김 총비서는 지난 연말 노동당 중앙위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밝힌 “북남관계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는 ‘대남부문에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 노선’을 헌법에 명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남북관계의 완전한 단절 시도이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 노선을 수정하는 ‘두개 조선’론을 공식화한 셈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정체성을 ‘통일지향 분단국’이 아닌 ‘독자적 사회주의 국가’로 새로 벼리려는 시도여서 북쪽의 대남정책을 포함한 대외전략에 변화가 예상된다.
김 총비서의 지침에 따라 최고인민회의는 “북남대화와 협상, 협력을 위해 존재하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기구를 폐지한다”는 결정서를 ‘일치가결’(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김 총비서는 “오늘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근 80년간의 북남관계사에 종지부를 찍고 조선반도에서 병존하는 두개 국가를 인정한 기초 우(위)에서 우리 공화국의 대남정책을 새롭게 법화했다”고 말했다.
김 총비서는 “쓰라린 북남관계사가 주는 최종 결론은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을 꿈꾸며 대결광증 속에 동족의식이 거세된 대한민국 족속들과는 민족중흥의 길, 통일의 길을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라며 “헌법의 일부 내용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인민들의 정치사상생활과 정신문화생활 영역에서 ‘삼천리금수강산’, ‘8천만 겨레’와 같이 북과 남을 동족으로 오도하는 낱말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교육교양사업을 강화한다는 것을 (헌법의) 해당 조문에 명기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쪽을 미국의 “노복(노예)국가” “외세의 특등주구집단”이라 비난했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의 적대적 발언은 실망스럽다. 남북 협력이 항구적인 한반도의 평화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김 총비서는 남쪽을 ‘적대국·주적’으로 규정한 데 그치지 않고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통일 노선과도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삭제돼야 한다”는 언급이 대표적이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은 1972년 남북의 최고지도자인 박정희·김일성이 특사를 낀 ‘간접 정상회담’을 통해 마련한 분단사 최초의 남북 당국 합의인 7·4 남북공동성명에 명기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이다. 50년 넘게 남북이 합의해온 통일 원칙을 부정한 셈이다.
김 총비서는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1년 8월 평양 낙랑구역 통일거리에 세워진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도 “꼴불견”이라며 철거를 지시했다.
김 총비서는 호전적인 발언을 이어가면서도 선제공격은 부인했다. 그는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헌법에)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만약 적들이 전쟁의 불꽃이라도 튕긴다면 핵무기가 포함되는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해 원쑤(원수)들을 단호히 징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연말 전원회의에서 “유사시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를 언급한 바 있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공격을 받는다면 ‘핵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엄포다.
김 총비서는 북방한계선(NLL)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도 표시했다. 그는 “경의선의 우리 측 구간을 회복불가한 수준으로 완전히 끊어놓는 것을 비롯해 접경지역 모든 북남연계조건들을 철저히 분리하기 위한 단계별 조치들을 엄격히 실시해야 한다”며 “우리 국가의 남쪽 국경선이 명백히 그어진 이상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 영공, 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곧 전쟁 도발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비서의 남북관계 단절을 통한 ‘대남 쇄국정책’은 호전적인 언어로 외피를 감쌌지만, 근본적으론 ‘흡수통일’ 회피를 목적으로 한 방어적 성격이 짙다고 여러 국내외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옛 동독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에서 공부한 뤼디거 프랑크 빈대학 교수는 한반도 전문 웹진 ‘38노스(North)’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은 총비서의 새 노선을 “위험 회피·제거 전략”(de-risking strategy)이라고 짚었다. 서독의 ‘특수관계론’에, 1974년 통일 조항을 삭제하는 헌법 개정을 통해 ‘두 국가론’으로 맞선 동독의 경우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다만 비핵국가였던 동독과 달리 북한은 ‘핵무장 국가’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 김 총비서의 새 노선엔 ‘남북관계’ 단절과 ‘핵무력’으로 ‘흡수통일’을 막고 북쪽 체제를 유지·발전시키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어서다.
국내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의 대응 방향에 따라 남북관계의 진로가 달라질 수 있다”며 “정부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대응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의 남북관계 단절 노선과 전쟁 언술을 구분해서 살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남북 사이 우발적 군사 충돌이 전쟁으로 번질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라며 “한·미 양국 정부가 위기 관리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