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탈원전 정책으로 지난해 말까지 모두 폐쇄된 바이에른주 군트레밍겐 원자력발전소. 위키미디어 커먼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원자력과 천연가스 발전에 대한 투자를 녹색 경제활동으로 인정하는 지속가능 금융 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 최종안을 확정했다. 집행위의 최종안은 27개 EU 회원국 가운데 20개국 이상이 반대하거나 EU의회의 과반수가 거부하지 않는 한 그대로 확정돼 내년부터 시행된다.
EU 집행위가 2일(현지시간) 발표한 그린 택소노미 최종안은 △신규 원전 건설과 안전한 운영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 운영 △핵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는 혁신적 원전의 연구·개발 등이 일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에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으로 분류하도록 했다.
신규 원전에 대한 투자가 녹색 경제활동으로 인정되려면 2045년 이전에 건설허가를 발급받아야 한다. 또 건설하려는 국가가 프로젝트 승인일 현재 방사성 폐기물 관리와 원전 폐기를 위한 기금,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을 운영하기 위한 세부 단계가 포함된 계획을 문서화된 형태로 보유해야 한다.
기존 원전의 수명연장은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수준까지 안전을 개선하고 2025년부터 사고 저항성 핵연료를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2040년까지 승인될 경우 녹색 경제활동으로 분류된다. 사고 저항성 핵연료는 기존 핵연료보다 훨씬 높은 온도까지 견디는 피복재로 처리돼 냉각재 상실 사고에도 오랜 시간 동안 용융이 안 되고 견디게 만드는 핵연료를 말한다. 이 핵연료 사용 조건은 신규 원전에도 부여된다.
최종안에 담긴 원자력의 녹색 분류 기준은 지난해 12월31일 발표된 초안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천연가스 발전시설에 대한 투자가 녹색 경제활동으로 분류되려면 킬로와트시(㎾h)당 온실가스를 270g 미만 배출하고, 오염을 더 많이 일으키는 기존 석탄발전소를 대체해 2030년말까지 건설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 2035년까지 재생가능 또는 저탄소 연료로 100% 가동되도록 설계돼야 한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원자력의 녹색 분류를 놓고 1년 이상 갈등을 빚어 왔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폴란드, 체코, 핀란드 등은 원전에 대한 투자 확대를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녹색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탈원전을 내건 독일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덴마크 등은 안전 문제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오스트리아는 집행위가 원자력을 녹색에너지로 분류한 택소노미를 강행할 경우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룩셈부르크도 이에 공조할 뜻을 밝혔다. 클로드 투르메스 룩셈부르크 에너지 장관은 집행위의 최종안 발표 뒤 트위터에 “우리도 오스트리아와 함께 추가 법적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올렸다.
집행위가 지난해 말 공개한 초안은 지속가능 투자를 지향하는 투자자 그룹은 물론
집행위에 자문하는 전문가 그룹으로부터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집행위는 “택소노미는 특정 기술이 회원국 에너지 믹스의 일부가 될지 아닐지를 결정하지 않으며, 기후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가능한 솔루션을 활용해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과학적 조언과 현재의 기술 진보를 고려할 때 전환 과정에서 가스와 원자력 활동에 민간 투자가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천연가스 발전에 대해서는 저탄소 가스를 2026년까지 30%, 2030년까지 55% 혼합하도록 한 초안의 중간 목표마저 삭제했다.
환경단체와 탈원전을 내건 일부 국가들이 이번 최종안이 그린 택소노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원자력산업계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럽원자력산업협회(FORATOM)는 “사고 저항성 연료는 2025년까지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이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지난달 초안 검토 과정서 집행위에 이런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최종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강정민 전 원자력안전위원장은 “사고 저항성 핵연료가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실제 원자로에 장전되기 위해서는 원자로 안전 운전과 관련된 컴퓨터 코드 시스템을 다 갱신하고, 또 갱신된 코드가 안전한지 규제기관이 검토해 허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그 과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소요되는 비용을 누가 지불할지도 문제”라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