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동자 2세의 건강 문제는 ‘엄마 노동자’의 건강과 직결한다. 일부 선천기형은 남성 유전자의 영향이 크다고 연구되지만, 한국의 반도체 산업 특성상 2세의 건강권은 여성의 노동권과 비례할 수밖에 없다.
국내 반도체 산업이 세계를 선도하는 것과 달리, 기저에 있는 반도체 생산직 여성 노동자의 생식독성 문제는 이제 겨우 명명되는 수준이다.
취급물질·공정을 비공개하는 기업의 영업비밀, 첨단기술 산업에 대한 정부 보호 등이 한 축의 원인이다. 연구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과로사도 한국에선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장기간 소송을 각오해야 하는 판국에 여성 개인의 문제로 간주되는 유산, 기형아 출산 등은 더 공론화되기 쉽지 않다.
특히 ‘20대 지방 여성에 대한 통제노동’이라는 국내 반도체 산업의 특성이 이를 거든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여성을 주로 채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른바 ‘노동권 비용’은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이종란 노무사(반올림 상임활동가)는 “대부분의 반도체 생산직 여성이 지방 실업고에서 취업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시키는 대로 일만 하면서 제 권리에 상대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며 “여성 노동자들끼리 생식독성 문제가 공유되기 쉽지 않고, 공유되더라도 불임치료나 인공수정에 어느 병원이 좋냐는 식의 정보를 나누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삶을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한 장면. 지방 출신 고졸 여성인 영화의 주인공 윤미씨는 대기업의 반도체 생산직 입사면접 자리에서 지원동기를 묻는 질문에 "(택시기사인) 아버지 차 바꿔드리고 동생 공부 시키려고 지원했다"고 답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실제 1990년대 말 삼성전자 기흥공장의 팹3과 C조 인원 109명(통제실 4명, 생산직 남성 1명 제외)의 출신 고교 현황을 반올림으로부터 입수·분석한 결과, 서울 출신은 영등포여상을 졸업한 유아무개(38)씨가 유일했다. 인원별로 보면 전라남·북도 고교 출신이 72명(68.3%)으로 다수였다. 반면 수도권은 18명(17.3%)뿐이었다.
현재 반올림과 함께 유족·요양급여 신청이나 산재 행정소송을 진행 중인 여성 노동자 30명(협력사·남성·학교 미확인 제외) 가운데서도 영호남·강원 쪽 실업고 출신이 80%(24명)였다. 서울 출신은 없다. 수도권은 5명(16.7%)이었다.
‘삼성전자 백혈병’이 공론화되면서 다종다양한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일터에서부터 여성의 생식독성 자각이 차츰 이뤄지고는 있다. 선천성 심장질환 아이를 출산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이 “병원의 업무 강도와 유해 약품 취급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아이에게도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올해 2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예방의학전문의)과 은수미 의원실이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토대로 △삼성전자를 포함한 반도체(전자) 사업체의 30대 여성 노동자들이 타 직종 여성 노동자보다 최대 94% 자연유산 진료를 많이 받고 △월경 이상도 20·30대 모두 최대 40% 더 진료받았다고 밝혔다. 그나마 생식독성 영향평가를 수치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성전자 출신 여성 노동자를 다수 인터뷰했던 김진희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는 ‘젊고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이 산업예비군으로 존재하는 구조’(<위기의 삼성과 한국 사회의 선택>)라고 말한다. 학교장 추천을 받아 대기업에 취업한 학교 대표, 지역 대표로서 권리보다 책임, 불만보다 긍지에 익숙한 노동자가 되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