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전자결재로 전기요금과 텔레비전 방송수신료(KBS·EBS 방송 수신료) 징수를 분리하기 위한 방송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을 재가한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다세대주택 우편함에 전기요금 청구서가 꽂혀 있다. 한전은 전기요금 청구서와 TV 수신료 청구서를 별도로 제작·발송하는 ''청구서 별도 발행'' 방식을 검토 중이며 두세 달가량은 현행 통합 징수 체계 틀을 유지하면서 원하는 고객들이 분리 납부를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연합뉴스
한선 호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 뚜렷하고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통계치들도 곰곰이 들여다보면 함정을 포함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오래 곱씹고 궁리해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는 것들이 세상엔 의외로 많다. 그러나 복잡하게 얽히고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대중이 모든 현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대중은 자신의 이해가 직접 연결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의외로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전문가의 식견이 요구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의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진영에 따라 소비될 뿐,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전공 분야에서도 그렇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흥미로운 콘텐츠가 넘쳐나고 누구나 원하는 메시지를 손쉽게 생산할 수 있는 미디어포화시대라서 그런지 주변에서 공영방송 무용론이나 전통 미디어의 저널리즘 무용론을 강조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보지도 않는 티브이 수신료를 왜 내야 하는지 반문하거나 수신료 분리 징수가 공영방송의 존립 문제와 별개라고 생각하는 주장들이 대표적이다. 이번 기회에 편파적인 공영방송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마저 들린다. 다소 무기력감에 휩싸여있지만 신발끈 다시 묶는 심정으로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에 대해 반문해 보았다. 최대한 자기검열 많이 하면서, 치우침 없이 우리 사회에 공영방송이 필요한 것인지 묻고 또 물어보았다.
내 결론은 동일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가 절반이 넘는 국민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조사결과를 접했다.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가 전 세계 4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담은 <디지털뉴스리포트 2023>에 따르면, <비비시>(BBC)로 대표되는 공공서비스 미디어의 뉴스가 나와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 묻는 질문에 우리나라에서는 55%의 응답자들이 사회를 위해 공공미디어 뉴스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나를 위해 필요하다는 응답자는 43%). 이 결과는 비록 진보에 가까울수록 공공미디어 뉴스의 필요성에 더 공감하는 경향이 확인됐지만, 좌우가 팽팽히 맞선 우리 사회의 정치 지형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었다. 진영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공공미디어의 경험 여부였다. 심지어 나이도 변수가 아니었다. 젊은층은 흔히 전통 미디어를 이용하지 않고 뉴스를 회피하는 그룹으로 분류되지만, 공공미디어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면 젊은층이라도 공공미디어 뉴스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공미디어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영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공공미디어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공공미디어의 뉴스 영역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던 우리나라의 비율이 뉴스 신뢰도가 높은 북유럽 국가군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공공미디어 뉴스가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는 응답은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다음으로 5번째였고, 나를 위해 필요하다는 43%의 응답은 7번째였다. 이는 공영방송 운영의 모범 국가로 분류되는 영국이나 독일보다 더 높은 수치였다.
결국 우리나라는 뉴스 신뢰도는 낮지만, 아니 어쩌면 뉴스 신뢰도가 낮기에 공공미디어 뉴스에 대한 요구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뜻이 그렇다면 공영방송의 존폐를 뒤흔드는 분리 징수 문제는 방향과 속도를 조절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