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가 1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
오는 8월 31일은 기지촌여성인권연대(이하 연대, 상임대표 우순덕, 공동대표 안김정애·김은진)가 출범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연대는 두레방, 햇살사회복지회 등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여성 인권운동을 해온 단체들이 2008년부터 4년 준비 끝에 탄생했다. 2012년 출범 때 연대는 두 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첫째는 한국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지촌 성매매피해여성 진상조사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었다.
연대는 지난 10년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의미 있는 성과도 냈다. 2014년 기지촌 여성 122명을 원고로 국가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 4년 뒤 2심에서 원고 모두에게 손해배상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재판부는 국가가 기지촌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운영·관리했다며 원고들의 인간 존엄성을 침해한 책임을 물었다. 그 뒤로 4년이 지났지만 아직 대법 판결은 나오지 않고 있다. 대부분 70~80대 고령인 원고들이 오는 23일 오전 11시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까닭이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대법 판결 촉구 기자회견이다.
출범 때부터 연대를 이끌어온 안김정애(63) 공동대표를 지난 14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월남한 상이용사의 딸로 태어나 인하대에서 ‘미국의 주한군사고문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안김 대표는 육사 강사와 옛 국방군사연구소(현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 조사2과장,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팀장 등을 지냈다.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 시절인 2015~2018년에는 세계 여성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여성평화걷기 대회’를 조직해 앞에서 이끌었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조속한 대법 판결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려고 해요. ‘미군위안부 문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법’은 19·20대에 이어 이번 21대 국회에서도 정춘숙 의원(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발의했는데 아직 법안 심의조차 안 되고 있어요.”
그는 “소송 원고 가운데 11분이 이미 돌아가셨다”며 대법 판결이 늦어지면서 특별법 제정은 물론 경기도의 기지촌 여성 생계 지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기지촌 활동가 등의 노력으로 2년 전 경기도의회에서 기지촌 여성 지원 조례가 통과됐지만 아직도 실행되지 않고 있어요. 도의 공무원들은 대법 판결과 상위법이 없다고 핑계를 대더군요. 도 차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도요.”
그는 “원고 4분의 3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일 정도로 기지촌 여성들의 생활 형편이 어렵고 또 기지촌 생활 중 잦은 낙태와 성병 방지 목적의 페니실린 과다 투약으로 여러 질병을 안고 있다”며 생계와 의료 지원이 시급하다고 했다.
2018년 서울고법 판결이 나왔을 때 언론은 ‘국가의 미군 기지촌 성매매 책임’을 사법부가 처음 인정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고법 재판부는 “국가가 미군위안부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등의 애국 교육으로 기지촌 내 성매매 행위를 조장·정당화했고 기지촌 위안부들을 ‘낙검자수용소’ 같은 강제시설에 격리해 수용하거나 신체적 부작용이 많은 페니실린을 무차별적으로 투여해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을 직접 침해했다”며 “원고 74명에게 각 700만원, 43명에게 각 300만원의 위자료와 그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진실화해위 활동을 마친 2010년부터 연대 출범 논의에 참여한 안김 대표는 연대가 뜨고 바로 소송 준비에 나서 하주희(현 민변 사무총장) 변호사 등과 함께 기지촌 현장에서 증언을 받기 시작했다. “기지촌 여성 중 소송 참여 비율이 채 1%도 안 될 겁니다. 돈 벌려고 자발적으로 한 것 아니냐는 일부 시선과 창피하게 생각하는 가족들 때문에 ‘커밍아웃’이 힘들더군요.”
그는 “국가 책임을 인정한 2심이 대법 판결로 확정되면 이후 변호인단이 미국정부 대상 소송도 검토할 것”이라며 “이 소송에는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미군위안부 출신 한인여성들도 국내 피해자들과 함께 원고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2012년 ‘연대’ 출범 8월말 10돌
4년 전 고법 손해배상 위자료 ‘판결’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법’ 계류중
“조속한 대법 판결·특별법 제정 촉구”
원고 100여명 23일 두번째 기자회견
“미국정부 상대 소송도 추진 검토”
국가가 왜 기지촌 여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냐고 묻자 그는 1968년 ‘닉슨 독트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한국 정부는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하자 미군을 잡아두려고 ‘기지촌 정화대책’을 수립해 기지촌 건물을 깨끗이 단장하고 기지촌 여성들에게도 몸을 깨끗하게 하라고 했어요. 성병을 미군에게 옮기지 말라는 거죠. 그때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법률상 금지된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어요. 캐서리 문 책 제목처럼, 여성 몸에 기반을 둔 ‘동맹 속의 섹스’였죠. 박정희는 1970년대 초 경기도 송탄의 미군 부대 앞 도로 확장 공사장을 찾아, 반강제로 동원된 기지촌 여성들 앞에서 ‘여러분들 덕에 우리 경제가 돌아간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힘들고 지치면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연설도 했어요.”
지난해 5월 17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열린 조속한 대법판결 촉구 기자회견 모습. 안김정애 공동대표 제공
그는 2심 판결에서 미국 책임이 빠진 점도 아쉽다고 지적했다. “기지촌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간 ‘낙검자 수용소’에서 미군 군의관으로 추정되는 하얀 가운을 입은 백인이, 한국인 의료진이 기지촌 여성들에게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장면을 뒤에서 지켜봤다는 증언도 있어요. 자국에서 직접 공수해온 페니실린을 한국 의료진이 빼돌리지 않고 제대로 주사하는지 감시할 목적이었겠죠. 그때는 미군위안부가 성병에 걸리지 않아도 미군이 성병을 옮겼다고 지목하면 수용소로 끌려가 쇼크사를 할 수도 있는 페니실린 주사를 맞아야 했어요.”
그는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아직도 국가 차원의 미군위안부 통계조차 없어요. 출국이 힘들었던 1960~70년대 김포공항에서 미국으로 나간 여성 숫자에 기반을 둬 20~30만명 정도로 막연히 추정만 하고 있죠. 얼마 전 국가기록원 쪽에 전국 보건소에서 미군위안부를 검진한 기록이 있냐고 물으니 찾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지금이라도 법을 만들어 국가가 미군위안부 규모와 인권침해 실태를 제대로 규명해야 합니다.”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
2013년부터 5년 동안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대표도 지낸 그는 전쟁을 “제정신이 아닌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 장애인)들이 민을 장기판의 졸로 삼아 벌리는 집단폭력 사기극”이라고 규정한다.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 푸틴, 부시를 보세요. 다 마찬가지죠. 이승만도 북진 통일을 떠들고 다녔잖아요.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죠.”
그가 여성이 평화와 안보 문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 임기를 시작한 2015년에 일부 진보 여성계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세계 여성평화운동단체인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Women Cross DMZ)와 손을 잡고 북에서 남으로 비무장지대를 종단하는 여성평화걷기 행사를 치러낸 것도 이런 신념이 작용했다. 이 여성평화걷기 대회는 그가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로 있던 2018년까지 이어졌다.
“평화와 안보 문제는 여성에게 정책 결정의 칼자루가 주어지면 답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여성은 전쟁이 아니라 대화와 외교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해서죠. 노벨문학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처럼 생명을 낳고 기르는 여성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상상할 수 없어요. 여성은 절대 전쟁하지 않아요.”
그가 군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고 평화와 분단 극복에 힘을 쏟는 데는 가정사 영향도 있단다. “아버지가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한 해병대 3기로 전쟁으로 다리를 다치셨어요. 제가 어릴 때 늘 밥상머리에서 전쟁 이야기를 하셨어요. 인민군과 백병전을 펼친 잔인한 이야기도 하셨죠. 그럴 때마다 너무 무서웠어요. 이모부 역시 팔을 다쳐 의수를 한 상이용사였죠. 제가 어릴 때 살던 서울 금호동 시장을 가도 이런 전쟁 부상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이런 주변의 군사 문화에 반감과 의문을 키우던 그에게 답을 제시한 이는 중2 때 사회 선생님이었단다. “70년대 초였는데요. 선생님이 매우 비판적인 분이셨어요.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지 말라고 하셨고 일제 시대 친일파 문제나 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죠.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아빠가 맨날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단으로 월남한 탓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죠.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이 문제 해결이 한국 사회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군과 분단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죠.”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이대 정외과에서 석사를 하고 박사는 인하대에서 받았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