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진 목사는 일꾼교회에 부임한 이래 20여 년 동안 동일방직 노동운동사를 비롯한 한국 산업화 과정 사료를 모아 ‘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을 준비해왔다. 사진 미문의 일꾼교회 제공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상의 여유와 평화가, 사실은 어느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해요. 지금 우리가 맘껏 누리고 있는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맨몸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잊어선 안됩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8대 총무이자 인천 ‘미문의 일꾼교회’ 담임인 김도진(63) 목사는 지난달 15일 미국에서 별세한 고 조지 오글(한국이름 오명걸) 목사를 위한 국내 분향소를 예배당에 차린 계기를 묻자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30상자 분량의 한국 산업화 과정 사료를 모아 ‘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을 추진해 왔는데, 재개발 사업 탓에 어려움에 부닥쳤어요. 재개발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다만 역사적 현장을 보존해 달라는 것이죠. 현재 교회 건물 보존이 어렵다면, 그 자리에 1961년 조지 오글 목사께서 처음 마련했던 선교회의 옛 초가를 복원하거나 노동 관련 박물관으로 만들었으면 해요.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품은 건물이 민주화기념지로 남아서 후대에 교육 현장으로 쓰인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1961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첫 자리
오글 목사 추방된 뒤 교회로 재설립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 피난처로
외환위기 때부터 실직자 푸드뱅크도
재개발조합쪽 보존 거부로 헐릴 위기
“민주화 위해 희생한 뜻 기억했으면”
1961년 조지 오글 목사가 인천 화수동 183번지 초가를 구해 문을 연 ‘기독교 도시산업선교위원회’ 사무실, 1976년 지금의 일꾼교회 건물로 새로 지었다. 사진은 1960년대 초기 활동가들 모습이다. 왼쪽 둘째부터 최영희 내일신문 부회장, 조화순·조승혁 목사 등이다. 사진 미문의 일꾼교회 제공
1961년 도시산업선교회가 문을 연 인천 화수동 일대는 대표적인 공장지대이자 빈민가였다. 선교회 활동 초기 인근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서 있는 조지 오글 목사의 모습이다. 사진 미문의 일꾼교회 제공
19세기말 개항 이래 인천에는 성냥공장 방직공장 등 무수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개항장이 가까운 인천에 공장을 지으면서 다른 지역보다 산업화도 빨랐던 탓이다. 인천 동구에 있는 동양방적 인천공장도 1930년 일제가 지은 공장 중 하나다. 해방 이후 서정익이 적산공장을 불하받아 지금의 ‘동일방직’이 됐다. 이 공장은 1978년 2월21일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하며 쟁의 중인 동일방직 여성 노동조합원들에게 어용노조가 똥물을 뿌린 이른바 ‘동일방직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정권의 비호 아래 노조를 탄압하던 회사와 경찰에 맞서 수백명 여성 조합원들이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고, 1970년대 한국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지금도 1950년대 지은 의무실, 1960년대 건립한 강당과 ‘여공’들이 지내던 기숙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 ‘여공’들이 군부정권과 회사 쪽의 탄압을 피해 피신한 곳이 바로 도시산업선교회 인천지부(인천산선)였다. 김 목사는 “당시 숱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700m 남짓 떨어진 인천산선까지 피신했었다”며 “우리 누이들의 삶과 저항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700m의 길을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로 이름 짓고, 기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 교회를 포함해 주변 18만㎡에 이르는 재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인천 화수·화평구역재개발조합은 현대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해 이곳을 모두 허물고, 지상 40층 높이의 아파트 3300가구를 지을 계획이다. 이에 김 목사는 역사의 현장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고안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인데 재개발조합 쪽에서 존치를 거부해 허물어질 처지예요. 빈민 구제와 노동 운동을 지원했던 역대 목사님들이 1970~80년대 중앙정보부의 사찰과 탄압으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어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과 관련해 진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미국으로 추방당했던 조지 오글 목사가 대표적이죠. 오글 목사는 일꾼의 교회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제5회 대한민국인권상도 받기도 했어요. 현대사의 의미 있는 공간이 이렇게 사라진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천산선은 오글 목사가 추방된 뒤인 1976년 2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재탄생해 지금의 교회가 됐다. ‘미문의 일꾼교회’는 또 다른 세상을 뜻하는 ‘문’(gate)으로 통하는 교회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도 장애인과 저소득층 자녀 교육과 푸드뱅크 사업에 공간을 내주고 있다.
“인천산선은 ‘약한 것을 강하게’를 지향해왔어요. 1980년대 중·후반 노동운동이 활성화된 뒤에는 지역사회 복지사업으로 눈을 돌렸죠.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노동자·장애인·저소득층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1998년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그때 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넘쳐났어요. 당장 쌀이 떨어져서 끼니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쌀 등 음식을 나누던 것이 지금의 푸드뱅크 사업으로 이어졌어요. 교육 기회를 놓친 장애인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도 30년째 이어오고 있고요.”
김 목사는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역사문화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혼자로는 역부족이라며 뜻있는 시민들의 동참과 응원을 호소했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