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 수 감소 등으로 어린이집이 문을 닫은 사례가 급증한 가운데 지난 28일 폐업한 경기도 한 어린이집의 문이 잠겨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5개월 된 딸을 둔 직장인 이아무개(38)씨는 육아휴직 뒤 복직한 다음부터 평일에는 딸을 거의 보지 못한다. 평소 아침 8시30분 출근해 잔업 뒤 저녁 7시께 퇴근을 하는데, 아이는 보통 아침 8시쯤 일어나서 저녁 8시쯤 잠들기 때문이다. 이씨는 “최근까지 육아휴직을 하며 딸을 돌봤기 때문에 아이가 아빠를 많이 찾는데, 복직 뒤 아이 얼굴을 볼 시간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씨 같은 보통의 노동자들은 현재보다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평일에는 사실상 어린 자녀를 돌보기 힘든 구조다. 정부가 지난 28일 이씨처럼 일하는 부모의 육아기 단축근로 확대 등 저출산(저출생) 대책을 내놨지만, 정작 노동 정책에서 주당 최대 근무시간 상한 연장 등으로 경쟁, 과로, 젠더 불평등을 부추겨 저출산 문제가 오히려 심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노동·교육·젠더 분야의 근본적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지만, 정부의 정책 방향은 저출산 해결의 방향과는 상충되고 있다. ‘주 69시간 노동’ 논란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한 주 당 69시간(주 6일 근무 기준)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육아는 몰아서 할 수 없다”는 등의 반발에 부딪쳐 재검토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저출산을 야기하는 한국 사회의 ‘경쟁지상주의’ ‘과로 문화’ ‘젠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의 장기적 관점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인구학)는 “정부가 획기적으로 대책을 낸다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경쟁감’이 줄어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정부는 저출산 대책에서 ‘경력단절 예방’을 강조하지만 주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은 되레 여성의 경력단절을 부채질할 우려가 있다. 최진협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정부가 주 69시간제 등(으로 여성이 일을 유지하기 힘들어져) 남성 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상황에선, 여성 노동자들은 주변 업무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박진경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사무처장은 “성별 임금 격차와 불안정한 노동 등 여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인구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짚었다.
교육 제도도 마찬가지다. 2019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미혼 성인남녀에게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를 묻자 ‘양육 및 교육비가 부담스러워서’(19.3%)라는 답변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아서’(44.7%)에 이어 두번째로 많았다. 그러나 ‘고교 입시 사교육’을 부추길 우려가 있는 자사고·특목고를 존치한다는 게 이번 정부의 기조다.
통계청 조사에서 자사고 진학을 희망하는 초·중학생은 지난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61만4천원을 썼는데, 일반고 진학 희망 학생은 1인당 36만1천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관련 규제가 대폭 완화돼 학교가 학생 선발, 교과과정 편성 등에 대한 재량권을 갖도록 하는 ‘교육자유특구’ 도입 정책도 고교 입시 경쟁 가열 요소로 꼽힌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은 “초등 단계에서 돌봄을 위해 들어가는 사교육비에 비해 입시 전반을 관통하면서 가계가 부담해야 하는 사교육비가 훨씬 많다”며 “입시를 정점으로 하는 경쟁 교육을 완화할 방안 없이는 제대로 된 저출생 극복 대책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윤 정부 집권 첫해인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이 26조원으로 통계청의 2007년 조사 이래 ‘역대 최대’를 기록해, 저출생 극복을 위한 사교육비 경감 필요성이 더욱 커진 상황이지만, 28일 대책에는 ‘빈틈없는 돌봄과 수준 높은 방과후 프로그램 제공’에 무게를 둔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계획’ 정도가 포함됐다. ‘입시 경쟁’ 탓에 유발되는 사교육비 경감과는 동떨어진 접근이다.
박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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