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돼 한 발짝씩 온다” 대선 후보 등 정치권·시민사회 애도 물결 이어져
고 이한열 열사의 34주기 추모행사가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지난해 6월9일 오후 배은심씨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1987년 7월9일 초여름의 무더운 날씨 속에 열린 이한열(당시 22) 열사 장례식에서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아들 대신 싸우겠다”고 절규했다. 배 여사는 그날 이후 '6월의 어머니'가 됐고, ‘거리의 민주투사'가 됐다. 연세대학교에서 서울시청으로 이어진 장례식 길에는 1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렸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가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이 열사 장례식 한 달 전인 6월9일 오후 배 여사의 넷째 중 큰아들이었던 이 열사는 연세대 정문 앞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다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 열사는 26일 뒤인 7월5일 숨졌다. 피 흘린 그의 모습은 6월 민주항쟁의 불길이 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아들의 죽음은 배 여사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날 이후, 평범한 주부였던 배 여사는 아들 앞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뒤 배 여사는 그해 8월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세상을 떠난 열사들의 유가족이 모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창립 1주기 행사에 참석했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만나 위로를 받았다. 배 여사는 ‘한열이의 이름으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참여해 전태일 열사 어머니 고 이소선(1929-2011) 여사와 박종철 열사 아버지 고 박정기(1928-2018)씨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 투쟁이 있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연대했고 연행되기도 했다. 34년을 그렇게 투쟁했다.
배 여사는 유가협 회장을 맡아 자식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목소리를 냈고, 422일간 국회 앞 천막 농성을 통해 억울하게 숨진 민주열사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끌어냈다. 2009년 용산참사 소식을 듣고 용산범대위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2016년 백남기 농민 사망, 2017년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정에서도 배 여사는 이들을 위로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힘을 보탰다. 지난해에는 군부 쿠데타로 시민들이 희생되는 미얀마인들을 만나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죽어서도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한 활동도 벌여왔다.
배 여사는 이러한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6월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고 이소선 여사 등과 함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배 여사는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서른세 번째 6월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며 “다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전하기도 했다.
배 여사는 앞서 2018년 6월 이 열사가 다니던 연세대학교와 이한열기념사업회가 함께 주관해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31번째 추모제에서 “민주주의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범벅되어 한 발짝씩 온다. (열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믿는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영상] 2018년,‘제31주기 이한열 추모제’에 참석한배은심 여사
배 여사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대선 후보를 비롯한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페이스북에 “6월의 어머님, 민주주의의 어머님,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님 배은심 여사께서 아들 이한열 열사의 곁으로 가셨다. 민주주의 한 길을 위해 노력하셨던 어머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비통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다”고 침통해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페이스북에 “배 여사께서는 아들의 뜻을 이어받아 지난 35년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해오셨다. ‘다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는 이 열사와 고인의 그 뜻, 저희가 이어가겠다”고 애도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도 “배 여사는 이한열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님이셨다”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대한민국 미래세대 모두에 대한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켰다”고 추모했다.
송영길 대표도 페이스북에 “계룡산 자락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아니 우리 시대 모두의 어머니셨던 배 여사님의 부음을 마주한다. 한 많은 평생이었으되, 이제라도 앞서간 한열이를 만나 못다 한 모정을 다 베푸시길, 영면하시길 기원한다”고 추모했다. 이낙연 전 대표도 “이 열사의 희생을 겪으시며 스스로 민주투사의 길을 걸으신 ‘시대의 어머니’. 여사님은 투쟁이 필요한 곳에 늘 함께하셨다. 여사님의 삶은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됐다”고 애도했다.
정의당도 “고인은 이 열사 사망 후 유가협에 참여해 전국을 돌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오셨다”며 “고인의 삶을 추모하며 우리 사회의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발검을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문정현 신부는 페이스북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고 했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해서 시술받고 일반 병실로 옮겨서 전화통화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라며 애통해했다.
배 여사는 지난 2017년 6·10항쟁 30돌을 맞아 가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아들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좋아도 좋은 것도 모르고 항상 마음이 괴롭게 살았던 나날들”이었다고 했다.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한열아, 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물어보고 싶은 것밖에 없어요. 30년 동안 갖고 있던 질문. 그냥 왜 그랬느냐고 묻고 싶고, 그것뿐이에요.”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아들을 만나는 데 35년의 세월이 걸렸다. 아들의 죽음 이후 “엄마가 갚겠다”며 온몸을 바쳐 투쟁했던 어머니가 이제 아들을 만난다. 아들에게 묻고 싶었다는 질문, 엄마는 이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발인은 11일 오전 9시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이고, 장지는 광주 망월동 8묘역(예정)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