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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산불 휩쓴 마을, 76살 시각장애인 “이 독거노인 집 다 타면…”

등록 2022-03-06 10:51수정 2022-03-06 13:50

울진 산불이 번진 삼척 고포마을
“활동지원사 따라 이동하는데 매캐한 냄새”
81년 살아온 집 타버리고 뼈대만 남은 주민
“한평생 사 모은 살림 다 타고 어떻게 살지…”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 붙어 전소된 강원 삼척시 고포마을에 위치한 김기현(81)·한채숙(71)씨의 집. 뒤로는 화재로 잿더미가 된 산이 보인다. 고병찬 기자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 붙어 전소된 강원 삼척시 고포마을에 위치한 김기현(81)·한채숙(71)씨의 집. 뒤로는 화재로 잿더미가 된 산이 보인다. 고병찬 기자

“대피해서 잠을 청하려는데 전화로 ‘이 집 탔다, 저 집 탔다’ 연락이 옵디다. 이 노인 혼자 사는 집 한 칸 다 타버리면 앞으로 어떡하느냐는 생각에 잠도 못 잤습니다”

강원 삼척시 원덕읍 고포마을에서 5일 만난 76살 이아무개 할머니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조심스레 문 앞으로 나와 말했다. 5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할머니는 “오래 산 이 집만큼은 앞이 보이는 것처럼 훤한데, 다 타버리면 어쩌나 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오전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울진·삼척 일대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도로 하나를 두고 강원도와 경상북도로 나뉘는 고포마을은 5일까지 도별로 각각 가옥 1채씩이 전소됐다. 여전히 강풍에 재가 흩날리는 마을에서 주민들은 긴박했던 대피 순간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물차 와도 역부족, 마당 수도로 물 뿌리고 대피”

시각장애인인 이씨는 “평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우리 집에 오는 활동지원사와 함께 있는데 갑자기 이장이 방송을 하면서 대피하라고 했다. 앞도 안 보이고, 허리도 아파 활동지원사를 따라 조심히 이동하는데 매캐한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20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줄곧 홀로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김화순(70)씨는 “호산2리 이장으로 있는 아들이 친구 2명과 불길 막겠다고 물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지만, 오후 5시가 넘자 이미 불길이 너무 거세 역부족이었다. 급한 마음에 집 마당 수도로 주위에 물을 뿌리고 대피했다”고 말했다.

화마가 덮친 4일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에 있는 원덕복지회관으로 대피했지만, 대부분 고령인 이들은 북적이는 대피소에서 코로나 걱정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시각장애인인 이씨는 활동지원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어 부득이 활동지원사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지난 2012년부터 10년째 활동지원사로서 이씨와 함께하고 있는 장명자(72)씨는 “4일 저녁에 일단 이씨 할머니를 원덕복지회관으로 옮겨드렸지만, 사람이 북적여 코로나도 걱정되고 무엇보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 혼자서는 생활이 어려우실 것 같아 집으로 모시고 하루를 보냈다”고 말했다.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 붙어 전소된 강원 삼척시 고포마을에 위치한 김기현(81)·한채숙(71)씨 앞. 고병찬 기자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 붙어 전소된 강원 삼척시 고포마을에 위치한 김기현(81)·한채숙(71)씨 앞. 고병찬 기자

뜬눈으로 4일 밤을 보내고 집 걱정에 5일 아침 일찍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에게 남은 건 불에 그을린 벽과 엉망이 된 집 안이었다.

“가족사진 한 장 못 챙겨…” 아직 연기 나는 집

김기현(81)·한채숙(71)씨 부부의 집은 지붕이 다 녹아버린 채 휑하니 뼈대만 남아있었다. 5일 오후 5시30분께에도 부부의 집 안에선 연기가 나고 있었다. 부부의 임시거처인 고포마을 민박 2층에서 김기현씨는 “태어난 후로 한평생 이 집에서 살아왔는데, 옷은커녕 가족사진 하나도 가져오지 못하고 집을 떠나왔다”고 말했다. 아들 김성일(48)씨는 “추억이 다 타버린 거지”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채숙씨는 “다 타버린 집을 처음 볼 땐 무덤덤하더니 자꾸 생각할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난다. 한평생 사 모은 냉장고, 텔레비전, 에어컨도 다 타버렸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붙어 전소된 강원 삼척시 고포마을에 위치한 김기현(81)·한채숙(71)씨의 집에서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고병찬 기자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붙어 전소된 강원 삼척시 고포마을에 위치한 김기현(81)·한채숙(71)씨의 집에서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고병찬 기자

“이웃들이 옷, 반찬, 구호물품 들고 찾아와 버텨”

이들은 서로에게 기대며 버티고 있었다. 한채숙씨는 16㎡(5평) 남짓한 민박 한편에 옷가지 대여섯 벌이 걸려있는 옷걸이를 가리키며 “정신없이 대피하느라 지금까지 어제(4일) 입은 옷 그대로인데, 다행히도 이웃들이 당장 입을 옷을 가져다줬다. 식사를 위한 김치와 반찬도 세 집에서 도와줬다. 당장 이걸로나마 어떻게든 해볼 순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구호 물품을 들고 온 이웃들이 이들을 연달아 찾아왔다.

다행히 삼척시 인근에 큰불이 잡혀 주민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왔지만, 걱정은 여전했다. 주민 홍연자(70)씨는 “듣기로는 큰 불길은 잡았다고 하던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니까 군인초소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순 없는 상황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집이 전소된 김기현씨는 삼척시에 빠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김기현씨는 “삼척시장이 제집을 보고 빠르게 조치하라고 읍장에게 지시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줄 것이란 말이 없어 답답하다”라며 “당장 임시로 지내는 민박 이용료도 시에서 다 부담해주는 것인지 몰라 걱정”이라고 말했다.

삼척/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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