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탑승 고속버스 시범운영 첫날인 2019년 11월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승강장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강릉행 고속버스에 타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버스회사 등을 상대로 휠체어 승강설비를 마련해달라고 장애인들이 낸 차별구제 소송에서 해당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노선 위주로 휠체어 승강설비를 설치하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소송당사자로 차별구제 범위를 제한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단체 등을 중심으로 퇴행적인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ㄱ씨 등이 국가와 버스회사 등을 상대로 낸 차별구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8일 밝혔다.
서울과 경기 고양시에 사는 뇌병변 장애인 등은 2014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과 연대해 교통약자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에 따른 이동권 보장을 위해 국가와 지방정부, 금호고속(시외버스), 명성운수(시내버스)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버스에 휠체어 승강설비가 마련돼 있지 않거나 저상버스가 도입되지 않아 이동권을 침해받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경기연구원의 연구보고서를 보면, 당시 기준 전국저상버스 도입률은 18.7%에 불과했고, 휠체어 승강설비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1·2심은 국가와 지방정부를 상대로 한 장애인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교통약자법에 국가와 지방정부의 저상버스 도입 의무가 부여돼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휠체어 승강설비 미설치를 두고서는 “차별행위에 해당한다”면서도 “적극적으로 휠체어 탑승설비 도입을 위한 시책을 추진하라고 명하는 것은 법원이 할 수 있는 구제조치 영역을 넘어선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금호고속과 명성운수를 상대로 한 장애인들의 청구에 대해서는 일부 인용했다. “버스회사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로 휠체어 탑승설비를 제공할 구체적 법적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버스회사가 휠체어 승강설비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차별행위에 해당하지만, ‘즉시 모든 버스’에 이를 설치하라고 한 원심 판결은 ‘비례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로 이들 회사의 영업상황이 좋지 않은 점을 들었다. 금호고속의 경우 2016년 이후 영업이익이 지속해서 감소했고, 명성운수도 2014년에 약 22억6600만원 영업손실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한 매립형 휠체어 승강설비 마련에 금호고속은 약 383억원, 명성운수는 약 62억원이 필요하고, 노출형 승강설비의 경우에도 이들 회사가 각각 229억원, 36억원의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원심은 재정상태 등을 심리하고 이를 토대로 이익을 형량해 의무 이행기 등을 정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원고 등 주거지, 직장 소재지를 고려할 때 향후 모든 노선 버스에 탑승할 구체적·현실적인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들이 탑승할 구체적·현실적 개연성이 있는 노선을 설치 대상 노선으로 휠체어 탑승설비를 단계적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애인 단체들은 대법원 판결이 퇴행적이라고 지적했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정책국장은 “원고들이 자주 사용하는 노선으로 제한해 판결한 것은 차별구제 소송의 취지를 퇴색시키는 처사다. 전면적인 버스 이동권 보장을 위해 장애인 전원이 소송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보편적 접근권 보장 요구를 제한하는 대법원 처사는 반헌법적이다. 당장 장애인들이 버스를 못 타는데 현실성과 개연성 측정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장애인의 영화 관람권 제한에 대한 소송도 진행 중인데 이번 판결처럼 당사자에 국한되는 결과가 나올까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한편, 2020년 기준 고속버스는 1742대 시외버스는 5919대가 운행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저상버스는 없는 상황이다. 전국 3만5천여대 시내버스 가운데 저상버스는 9840대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휠체어 탑승설비가 설치된 고속버스를 10대 시범운영하고 있다. 시내버스의 경우, 저상버스가 있어 휠체어 탑승설비가 설치된 버스는 따로 없다”고 말했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