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31일 낮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날 선고를 규탄하며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부하 장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해군 간부들에게 대법원이 엇갈린 판결을 내려 논란이 일고 있다.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해군 대령에 대해서는 군사법원이 내린 무죄 판결을 뒤집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지만, 같은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직속상관에게는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공대위)는 “믿을 수 없는 반쪽짜리 판결”이라며 반발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군 형법상 강간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대령(사건 당시 중령) 김아무개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31일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반면,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같은 혐의로 기소된 소령 박아무개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박씨는 2010년께 직속 부하였던 장교 ㄱ씨를 10여 차례 성추행하고 2차례 성폭력을 한 혐의를 받는다. 이에 ㄱ씨가 지휘관(함장)이었던 김씨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구제를 요청하자, 김씨는 상담을 빌미로 ㄱ씨를 성폭력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이 발생하고 7년이 흐른 2017년 7월, ㄱ씨는 박씨와 김씨를 군 형법상 강간치상 등 혐의로 고소했다. 해군은 그해 9월 박씨와 김씨를 같은 혐의로 기소했다.
1심을 맡은 해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이들의 혐의를 인정해 그해 박씨에게 징역 10년, 김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일로부터 오랜 시간이 경과됐는데, ㄱ씨는 기억에 남아있는 당시 상황들을 통해 범행 일시와 장소 등을 특정하고 있다”며 박씨 등의 혐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2심을 맡은 고등군사법원은 이듬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는 피고인의 혐의를 증명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또한 “7년이라는 기간이 지났다. 피해자 기억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재판부별로 판단이 갈렸다.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한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진술 신빙성 유무 등을 기초로 범죄 성립 여부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 1부는 “ㄱ씨 진술은 수사기관에서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경험의 법칙에 비춰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 ㄱ씨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한 원심 판단은 잘못됐다”며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반면, 대법원 3부는 “이 사건과 김씨 사건은 사건의 구체적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 진술 등이 서로 달라 신빙성이나 신빙성 유무를 기초로 한 범죄 성립 여부가 달리 판단될 수 있다”며 “원심 판결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박씨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에 일부 모순되거나 배치되는 정황들이 있다는 원심 판단을 대법원이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군인권센터 등 10개 단체로 꾸려진 공대위는 이날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은 3년4개월 동안 대체 무얼 한 것인가. 고작 고등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을 다시 확인시켜주기 위해 긴 시간 판결 선고를 기다리게 한 것인가”라며 대법원 판결을 규탄했다. 피해자 법률대리인단 박인숙 변호사는 “첫번째 가해자의 성폭력 행위에 대해 상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두번째 가해자에 의해 성폭력이 이뤄졌다. 두 사건을 따로 봐 한 사건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한 사건은 부정하는 것은 부당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법원은 이 두 사건을 병합해 한 재판부가 판단하도록 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공대위는 피해자 입장을 대독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입장문에서 “제가 겪어야만 했던 그날의 고통들을, 그 수많은 날들의 기억을 신빙성이 부족하다며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판결을 이해할 수 없다. 파기환송과 기각이 공존하는 판결로 오늘의 저는 또 한 번 죽었다”고 했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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