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밤 시민추모제를 마친 유족 등 참가자들이 녹사평역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서혜미 기자.
“어제는 하얀 눈이 많이 왔어. 온 세상이 이렇게 하얗고 예쁜데 이 세상을 같이 볼 수 없는 게 너무 외롭고 힘들다(고 조한나씨 어머니)”, “우리 딸 결혼하면 축가 불러주었을 친구들이 너의 49재에 진혼곡을 불러주었구나(고 이상은씨 아버지)”,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언니 생일이 다가와. 겨울에 태어났지만 추위를 잘 타던 언니, 이번 연도 가족 생일은 다 챙겨주고 막상 3일 뒤 언니 생일의 주인공은 왜 공석일까(고 최정민씨 동생)”
이태원 참사 발생 49일째인 16일 저녁 8시께, 사고 현장 인근인 서울 용산구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해밀톤 호텔 앞에서 희생자의 유족이 한 줄 한 줄 편지를 낭독할 때마다 유족도, 추모제에 참석한 시민들도 함께 울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이날 저녁 6시부터 이태원역 해밀톤 호텔 뒷편에서부터 녹사평역 구간까지 4개 차선 위에서 시민추모제를 열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영하 5∼6도의 강추위에도 유족과 친인척 300여명을 비롯해 주최 쪽 추산으로 연인원 8천여명이 다녀갔다. 시민추모제 시작 전 유족들은 오후 5시께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에 마련된 시민합동분향소에서 참배와 헌화를 하고, 추모제 무대가 설치된 이태원역 방향으로 이동했다.
“압사 당할 거 같아요.” 이날 저녁 6시34분이 되자, 참사 당일 저녁 6시34분 압사 위험성을 처음 경찰에 알렸던 112신고자의 음성이 추모제 현장에 재생됐다.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안전한 곳에서 환생하기를 빈다”며 시민들에게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추모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주최 쪽이 나눠준 손팻말인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외에도, ‘우는 거 말고 해줄 게 없네요’ ‘미안해요, 우리가 많이’ ‘함께 규명하겠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추모제에서 주최 쪽은 유가족이 공개에 동의한 희생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추모제에 참여한 일부 시민은 무대 화면에 희생자의 사진과 이름이 나오면 희생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고, 희생자의 이름을 따라부르는 시민 수도 점차 늘어났다. 유족도 희생자의 이름과 사진이 나올 때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기도 했다. 이어 추모제는 가족 영상편지와 추모발언, 가수 하림·416 합창단의 추모공연으로 이어졌다. 저녁 8시께부터는 유가족과 친구 등이 희생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거나 대독했다.
이종철 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그리움이 조금씩 나아지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과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며 정부 관계자들의 비상식적 발언, 더딘 진상규명, 참사 이후 유가족·피해자 방치 등을 고통의 원인으로 꼽았다.
추모제를 함께 연 시민대책회의는 △국가 책임 인정 및 대통령의 공식 사과 △진상 규명 과정에 피해자 참여 △책임자 처벌 △이태원 참사 추모공간·피해자 종합지원대책 마련 △2차 가해 방지 대책 △재발방지 및 안전사회 대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49재를 맞은 16일 밤 서울 이태원역 앞 도로에서 열린 시민추모제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고인들을 추모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밤 9시10분께 참가자들은 윤석열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며 용산 대통령 집무실 방향으로 행진했지만, 경찰은 녹사평역 근처에 폴리스라인과 펜스, 버스를 겹겹이 치고 막았다. 유족들은 “대통령실에 요구서를 전달하려 한다. 10월29일 경찰은 뭘 했느냐”고 따졌다. 경찰의 해산 방송 끝에 유족 대표만 대통령실에 국가 책임 인정과 대통령 공식 사과 등을 담은 요구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추모제는 밤 9시50분께 끝났다.
이날 추모제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참석했다. 전날 국민 패널 100명이 참여한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도 참사와 관련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던 윤 대통령은 이날도 직접 사과 등 메시지는 내놓지 않았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위로의 마음은 그날이나 49재인 지금이나 같다. 진실을 규명해 합당한 조처를 하는 게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길이다. 거듭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조계사에서 열린 위령제에는 강승규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참석했다고 한다.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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