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31일 핼러윈데이 저녁에 서울 이태원 거리에서 시민들이 다양한 복장을 하고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태원 참사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대의 편지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10.29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 공동기획으로 희생자 가족, 생존자, 목격자와 구조자들이 함께 10월29일과 그 후 이야기 나누는 자리도 마련합니다. 재난을 먼저 겪은 이들과 인권·재난전문가들이 곁이 되겠습니다.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줄 생존자, 구조자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채널(10.29이태원참사피해자권리위원회), 전자우편(1029dignity@gmail.com), 유선전화(02-723-5300)
이태원을 처음 가 본 건 2011년으로 기억합니다. 성소수자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드러낼 생각도 못 하던 당시 다른 사람의 눈치를 안 보고 거리를 다닐 수 있다는 공간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함께 방문한 것이 첫 기억입니다. 그때 이태원에서 제가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한희라고 합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한 명의 성 소수자며,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를 뽑아본다면 다양성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 최초의 모스크를 비롯해 여러 각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며, 외국인과 이주민들을 만날 수 있고 성소수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렇게 다름을 포용하고 낯섦을 꺼리지 않는 곳이기에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문화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공간으로서 이태원을 상징하는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2014년 핼러윈에 저 역시 이태원에 놀러 갔던 일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어지러우면서도 동시에 여러 개성적인 모습들을 만나는 즐거움과 해방감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10월29일, 그날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올라왔던 여러분들도 아마 그러하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봅니다.
어느덧 참사 이후 2개월이 지났습니다. 몸에 시린 추위에 못지않게 그날의 아픈 기억들이 마음에 사무치는 나날입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갖고 계신 여러분들은 얼마나 힘들지 저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 합니다. 어떠한 위로가, 어떠한 격려가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곁에 함께 있겠다는 말만 건네 봅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날의 아픔과 슬픔은 결코 여러분의 탓도, 핼러윈 축제의 탓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공간에서도 안전하게 함께 일상을 즐길 수 있고 이는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입니다. 10월29일의 참사는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권리 침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이들의 책임입니다. 그날 핼러윈을 즐기고 이태원을 찾았던 그 누구도 이런 일을 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손을 놓은 가운데 그래도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이 모였고, 합동 분향소가 차려져 온전한 추모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모인 수많은 시민의 마음을 담아 그 공간을 ‘10.29. 이태원 참사 기억의 길’로 재단장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아픈 기억을 함께 공유하는 지역 상인들과 주민들이 유가족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이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를 잃은 그 마음을 존중하고 공감하고 싶습니다. 누구도 더는 외롭고 절망의 시간을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고통과 아픔, 슬픔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곁 프로젝트’를 하는 피해자권리위원회를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드립니다.
추모와 애도는 떠나간 희생자들을 온전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희생자들의 삶을 기억함과 동시에 10월29일 함께 모였던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기억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날의 기억을 지닌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여기 이태원이 다양성과 다름이 공존하고, 많은 시민이 환대와 연대로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남기를, 그렇게 하여 언젠가는 모두가 다시 이 공간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사로 희생되신 159분의 명복을 빕니다. 기억하고 잊지 않겠습니다.
2022년 12월28일
박한희 드림
10.29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