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앞 광장에 차려진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을 지난 22일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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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사를 당한 유가족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대한민국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에 대한 한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면 모든 국민이 유가족이 된다. 순번을 받아놓고서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지난 9일 서울시청 광장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분향소 앞에서 열린 희생자 추념과 문화예술인의 예술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나온 유가족의 발언이 이마를 쳤다. 한국작가회의, 한국민예총 및 문화연대 등 많은 예술인이 이태원 참사에 따른 ‘추모예술행동’을 조직하면서 ‘모두를 위한 만가, 슬픔을 감추지 마라’라는 주제로, 운동의 진행 방향과 내용 등을 모색하기 위한 담론 형성의 장이었다. 이에 사회적 참사의 재현과 애도의 정치에 대한 비판, 추모예술과 넋기림전의 진행 사례, 이후 시민대책회의의 활동 현안과 전망 등 다양한 의견과 실행방안들이 도출·논의되었다.
그런데 토론회 마무리 부분에 마련한 유가족과의 대화에서 나온 발언들이 어떠한 담론들보다도 선명하고 강하게 마음을 때렸다.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한다는 유가족들은 ‘처지가 만드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담담하면서도 깊은 어조로 동참을 호소하였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라는 호소만이 아니라 “그래, 내 딸은 이 세상에 살려고 온 소명을 다하고 갔다고 치면, 그 아이가 엄마 아빠에게 남겨준 소명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한다”면서, 사람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사람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세상을 함께 나서서 고쳐나가자고 강변하였다. 가슴이 아렸다. 최소한 개인사의 영역에서 애도와 안식으로 치러야 할 가족의 죽음을 이렇게 거리로 불러낸 것도 미안한데, 더하여 국가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갈림길을 가르는 매개체로까지 동원되는 듯하여 미안하고 씁쓸했다.
“‘안녕하세요?’라는 단어가 이토록 소중한 줄 몰랐다.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이 된 이후로 아무도 나에게 안녕하냐고 묻지 않는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진정 이 나라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는가에 대한 분노에 이르렀다.
물론 그 분노는 명색이 시를 쓰고 예술을 한다는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추념과 애도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위험이 일상화된 사회를 바꾸기 위해 나선 이들의 공동연대의 공간이자 발화점으로 하자는 데 공감하였다. 또한 예술적 내용과 방식으로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고 형상화하는 예술행동을 통하여 자본의 최전선에서 쪼개지고 소외되어 위태로워진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고, 공동의 삶으로 나아가는 매개체가 되도록 하는 예술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러함에도 씻기지 않고 목구멍에 남아 있는 몇 마디 말을 비명 지르듯이 남긴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는 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오늘의 묵은 그림자를 돌아보고 내일을 여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되기 마련이다. 수년 전의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것이 그늘에서 운용되던 국가기관의 오류든, 또는 자본을 추구하던 사이비 종교단체의 의도된 행위든 간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었던 국가적 참사가 발생했으면 국가가 먼저 나섰어야 했다.
힘 있는 원인행위자들의 편에 서서 이를 흐지부지 덮고 넘어가는 데에 한 나라의 힘을 다 쏟을 것이 아니라, 억울한 참사의 대상자가 된 국민의 편에 서서 우선 성심껏 사죄하고 그 원인과 진상을 낱낱이 발본색원하면 되었을 터이다. 그러한 국가의 행위 자체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한 차원 높은 미래의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응당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든 덮어보고자 온갖 꼼수와 술수를 앞세우다 보니 권력은 권력대로 감방에 갇혀서 막을 내릴 정도로 추악해지고, 나라는 나라대로 엉성한 옛날의 나라로 추락하였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다 보니 이번 이태원 참사 역시 단순한 세월호 참사의 데자뷔를 넘어 판박이처럼 국가의 공적 기관에서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온갖 사술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도리어 세월호 참사에서 얻은 학습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욱 미세하고 악랄한 행태들이 숨을 막히게 한다. 죽은 적의 군인도 시신은 돌려주고 장례를 지내서 영혼을 달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어울려 이승에서의 한을 풀고 저승에 안착함은 물론 산 자들의 일상을 편안히 영위하도록 소망하는 오래된 인간의 습속이자 문화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난달 시청 앞 광장의 이태원 참사 분향소를 철거하겠다고 통보했다. 어찌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감추고 그 분향소마저 제약하고 침탈하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아니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러할 수가 있는가? 이러니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로 여태껏 심판받고 있는 지지난 정부가 차라리 양반이었다는 푸념과 비아냥으로 마음의 비수를 예리하게 갈고 있는 것이다.
국가든 법이든 그 맹세나 조문으로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이 인간의 생명을 비롯한 기본권과 자유이다. 그것이 근대에 형성된 현대국가의 기본이자 근간이 되었던 철학이다. 이를 넘어설 때 독재국가가 되고 파시즘 사회가 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에서 독립하자마자 강대국에 기댄 독재자와 총칼을 앞세운 군 출신 파시스트들에게 짓밟히며 흔들려온 이 나라가 이제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아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아득함으로 우리는 ‘스스로 글로리’ 한 눈앞의 독재자들과 싸우고 끝내 이겨왔다. 그것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역사적 전통이자 본질이다. 실수와 악랄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를 섞어서 전도시키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처럼 공공성에 반하는 행위들이 그대로 묻히거나 잊히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는 전언이자 경고를, 가난한 시인의 외침으로 보낸다. 우리들, 아무리 해봐도 짧은 인생이다. 좀 맑고 선하게 살다 가자!
박관서 시인(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