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서울 용산구 해밀턴호텔 옆 골목에 들어설 빌보드(게시판) 조감도. 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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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주기를 한달여 앞두고 참사 현장을 기억과 애도의 공간으로 정비하기 위한 구체안이 확정됐다. 유가족과 시민사회, 이태원 상인 등이 함께 논의한 결과물로 25일 공식 발표된다.
10·29 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 산하 피해자권리위원회는 용산구청 참사대책단과 협의 끝에 참사 현장 중간정비안을 확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서울 용산구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 이름 붙이고, 3개의 빌보드(게시판) 등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빌보드는 골목 초입부에 설치되고, 같은 자리에 붙어 있던 시민들의 추모 메시지들은 모두 수거돼 별도의 공간으로 옮겨진다. 추석 직후 공사를 시작해 참사 1주기를 3일 앞둔 다음 달 26일 시설물이 공개된다. 시설물 설치 비용은 구청에서 책임지기로 했다.
앞서 시민대책회의는 수차례의 논의를 통해 빌보드 형태의 시설물을 참사 현장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동상처럼 특정한 형태를 띤 조형물은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이번 작업의 예술 감독을 맡은 미술가 권은비 작가는 “구체적인 형태가 있으면 오히려 관련된 담론들이 축소될 수 있다”며 “빌보드는 네모난 판이고, 빈 종이다.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 지역 주민과 상인, 구조자 등 참사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그곳을 채워간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3개의 빌보드는 각기 다른 내용으로 구성된다. 한 개의 빌보드는 유가족과 시민사회가 함께 작성한 메시지로 채워진다. 메시지는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은 미완성입니다”란 문장으로 시작해 “이곳에서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고, 그 시간을 목격한 모든 사람을 기억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남아있다. 누구나 안전하게 이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란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날의 밤을 기억하는 모두의 오늘이 안녕하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문장은 희생자의 출신 국가 및 사용 언어 등을 반영해 모두 14개 언어로 기재된다.
빌보드 속 메시지의 핵심 열쇳말은 ‘미완성’이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으로 진정한 진상규명이 이뤄졌을 때 온전한 ‘기억과 안전의 길’이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동시에 이태원 참사의 의미가 특정한 프레임에 갇히지 않게 하려는 뜻도 담았다.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장인 자캐오 신부는 “참사 현장에 아직 못다 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시작될 수 있도록 했다”며 “참사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계속 말을 걸겠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 이태원 참사 관련 예술작품과 시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담긴 시설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시설물은 다음달 26일 공개된다. 사진은 24일 서울 용산구 해밀톤호텔 옆 참사 현장.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나머지 빌보드에는 각각 이태원 참사 관련 예술작품과 시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담긴다. 작품과 추모 메시지는 2개월 간격으로 교체된다. 시민대책위는 이를 위해 시민사회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빌보드 운영을 담당하고, 용산구는 시설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기로 했다.
모든 빌보드 안에는 따뜻한 톤의 엘이디(LED) 조명이 내장돼 밤이 되면 은은하게 빛이 나도록 설계됐다. 참사현장이 생존자와 시민들이 다시 안전하게 찾는 장소, 회복과 위로의 장소가 되길 바라는 유족과 시민사회, 지역 주민과 상인들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따뜻하게 품어주는 공간’은 유족과 지역 주민, 상인들의 공통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시민들의 통행에 문제가 없도록 빌보드의 폭도 최소화했다. 권 작가는 “많은 인파들이 골목에 밀집했을 때 빌보드가 그곳을 환하게 비춤으로써 시각적인 주의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길 곳곳에는 ‘참사 현장’을 뜻하는 표지들이 놓인다. 참사의 시작점엔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남아있다’는 문구의 바닥 표지석이 놓이고, 반대편 종착점에는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적힌 바닥 표지석이 깔린다. 높이가 다른 2개의 표지판도 골목 진입로 쪽에 만들어진다.
이번 중간정비는 이태원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사됐다. 참사 전반의 진상규명 등을 목적으로 한 특별법은 지난 6월 야당 주도로 국회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됐지만, 정부·여당이 반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족과 시민사회, 이태원 상인 등 이해당사자 간 소통이 촘촘히 이뤄지면서 큰 갈등 없이 논의의 물꼬를 텄고, 결과물을 도출했다. 용산구청은 지난달 유가족과 시민사회가 중간정비 촉구 기자회견을 연 뒤 협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자캐오 신부는 “유족분들이 열린 태도로 길을 열어 주신 덕분에, 지역 주민, 상인, 행정가 등 이해관계나 입장이 다른 분들을 만나 협의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며 “이런 사회적 참사 뒤에는 참사와 관계된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갈등 자체를 지우거나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 갈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전환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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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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