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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강간살인 미수 ‘돌려차기’ 생존자 487일의 투쟁 [인터뷰]

등록 2023-10-03 09:00수정 2023-10-03 20:07

[인터뷰]
부산 ‘돌려차기’ 가해자 징역 20년 확정
“내가 안 나섰으면 죗값 다 안 받았을 것”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민예진(가명)씨가 지난 3월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민예진(가명)씨가 지난 3월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첫 공판 때 민예진(가명·27)씨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재판정에 들어갔다. 누가 알아볼까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 다음 공판부터 지난 21일 있었던 대법원 확정 판결 때까지, 민씨는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재판에 임했다. 재판정은 “가해자가 심판 받는 곳이지 피해자가 심판 받는 곳이 아니니까, 떨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민씨는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피해자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강간 등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아무개(33)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10년 동안 신상공개와 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 기관 취업제한, 20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도 유지됐다.

“(법규 해석과 적용을 따지는) 법률심이라서 짧게 끝나더라고요. 사건번호 얘기하고 가해자 얘기하고 20년이라고 얘기하더군요.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컸고 ‘하나가 끝났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사 소송도 남았고, 보복협박이랑 모욕 혐의도 남아 있으니까요.” 대법원 판결 사흘 뒤인 지난 24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 CCTV도 피해자가 확보…“사법체계 문제 있다”

민씨는 지난해 5월22일 새벽 5시께 부산 진구 서면에서 약속을 마치고 오피스텔로 귀가하다가 이씨에게 돌려차기로 뒤통수를 가격 당하는 등 무차별 폭행 피해를 입었다. 애초 이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지만, 피해자가 입었던 바지에서 이씨의 디엔에이(DNA)가 검출되는 등 추가 증거가 드러나면서 2심에서 강간 살인미수 혐의로 검찰이 공소장을 변경했다.

민씨는 사건 이후 487일 동안 기적적으로 피해로 인한 부상에서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외부에 호소했다. 사건 당시 시시티브이(CCTV) 영상 원본을 확보해 언론에 직접 알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사건’이 이슈가 됐고, 이씨의 성폭행 관련 혐의가 추가됐다.

민씨는 피해자가 직접 나서야만 진실을 더욱 상세하게 파헤치는 사법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정보를 얘기해주거나 의심되는 점이 있다거나 그래도 잘 조사해보겠다고 했으면 제가 이렇게 나설 이유가 없죠. 제가 안 나섰으면 공소장 변경도 안 됐을 거고 그랬으면 가해자가 모든 죗값을 받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민씨는 사건을 공론화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내 목숨을 20년으로 늘리는 성과였다고 생각해요. 피해자가 사건을 호소하면 사건에 생동감이 생긴대요. 꾸준히 의문을 제기하면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민씨가 자신이 피해를 입은 사건에 적극 대응하고 재판과 소송 과정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리면서, 또 다른 범죄 피해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연락이 많이 왔어요.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가 배상할 돈이 없다고 해서 변호사 비용을 내지 못해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한 피해자도 계시고, 국가에서 제공하는 상담에서 오히려 상처를 받는 분들도 많고요.”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민예진(가명)씨가 지난 7월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만든 ‘대한민국 범죄피해자 커뮤니티’ 카페 화면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민예진(가명)씨가 지난 7월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만든 ‘대한민국 범죄피해자 커뮤니티’ 카페 화면

민씨는 자신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7월1일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대한민국 범죄피해자 커뮤니티’(Korea Crime Victim Community)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이 카페는 개설 2달여만에 96명의 회원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고, 민씨를 비롯한 10명이 스태프로 활동하고 있다. 범죄 피해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당사자가 아닌 시민들도 참여해 응원하고 있다고 민씨는 전했다.

■ 피해자 지원, A4 안내문 주고 알아서 찾으라는 나라

“범죄 피해자가 언론 보도에 있어서도 사각지대를 느끼지 않게 하고 싶은 1차적인 목표가 있고, 2차적인 목표는 피해자들을 위한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만드는 것입니다. 피해를 당하신 분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철저히 무너져 있는데, 성범죄면 성범죄, 살인미수면 살인미수 등 전문분야에서 세부적으로 강의를 만들어주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피해자들이 숨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걸 방치하고 있는 게 나라니까요.”

민씨가 카페를 만든 이유에는 지금도 피해자가 접할 수 있는 사건과 관련한 정보가 너무 폐쇄적이라는 점도 있다. “범죄 피해자라고 하면 A4 용지로 된 안내문 딸랑 하나 주고 (피해자 지원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되고 가이드라인이 책자로라도 있어야 하고, 특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가진 이들은 기억력이나 주의력이 안 좋으니까 그런 피해자의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어요.”

대법원에서 가해자 이씨의 성폭력처벌법 위반(강간 등 살인미수) 혐의 확정 판결이 났지만, 법적 과정이 모두 마무리된 건 아니다. 가해자 이씨가 구속된 상태에서 했던 보복성 발언과 모욕 혐의에 대한 형사재판, 그리고 민씨가 제기한 민사소송과 관련한 재판이 남아 있다. 지치지 않느냐고 묻자 민씨는 “이미 재판이 일상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씨는 다른 모든 범죄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도 많이 해보니 이제 재판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 똑같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저는 잘못이 없으니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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