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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변혁을 꿈꾸던 젊은이 시장경제 신봉자로

등록 2007-01-05 19:06수정 2007-01-10 11:39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신수동 사무실에서 동료와 함께 2월에 열리는 동계수련회 프로그램, 회원참여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 href="mailto:anaki@hani.co.kr">anaki@hani.co.kr</A>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신수동 사무실에서 동료와 함께 2월에 열리는 동계수련회 프로그램, 회원참여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87년, 그 뒤 20년] 386 다섯갈래의 삶 ③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 최홍재씨

열혈 운동권에서 뉴라이트로…
운동권 선봉에서 ‘북한 현실’ 파악뒤 180도 급선회
‘세금 반대’시위 바쁜 나날…“기업 성공이 잘 사는 길”

한때 체제전복 세력으로 현상금이 붙은 수배자였다가 이제는 옛날의 ‘타도 대상’과 한데 어울려 우익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여럿 있다. 최홍재(40)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게 1987년은 ‘자랑스러우면서도 부끄러운’ 모순의 과거다.

알아주던 운동권
1993년 한총련 1기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실장으로 수배 생활을 하던 최홍재씨가 9월말 한가위를 맞아 월출산에 올랐다.
1993년 한총련 1기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실장으로 수배 생활을 하던 최홍재씨가 9월말 한가위를 맞아 월출산에 올랐다.

“대학 새내기 시절 학생운동과 부모님의 기대, 개인적인 목표(기자) 등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은 이런 고민을 없애줬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나도 값진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 뒤로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최씨는 알아주던 운동권이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7년부터 시위를 하다 붙잡혀 구류를 살았고, 연말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옥살이를 마친 뒤에도 여전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입대할 때도 그는 학생운동 쪽을 지켰다. 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숨지고 대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던 때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거리에서 시위대를 지휘하며 “정권 타도”를 외쳤다. 당시 함께 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386세대 사업가의 선두주자로 주목받았던 이철상 브이케이 사장인데, 이 사장이 이후 재야단체에 몸을 담다 사업가로 방향을 튼 반면 최씨는 줄곧 같은 길을 걸었다.

91년 8월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돼 94년 자진출두할 때까지 4년 동안 수배자 생활을 했다. 그는 “이동할 때마다 불안하고, 악몽을 꿨다”며 “90년대 말까지도 거리에서 전경을 마주치면 놀라곤 했다”고 회상했다.

93년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실장을 거쳐 97년까지 전국연합 자주통일위원회에서 활동했고, 같은해 북녘동포돕기운동을 펼쳤다. 그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한 건 이즈음이다.

“과거가 부끄럽다”

“너한테 믿음을 접는다!” “결국 권력을 추구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냐?”

2004년 그가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기사가 나간 뒤 친구들이 보였던 반응이다. 인터뷰에서 옛 생각을 전면 부정하고 나선 그를, 옛 ‘동지’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87년 당시의 타도 대상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보다 100배는 나쁘다고 확신했다.

최씨가 생각을 고친 연유는 이렇다. 그는 91년 박성희·성용승씨 밀입북 사건의 배후였다. 이들이 북한에서 나와 독일에 머물다 98년 귀국할 때까지 줄곧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이들이 정작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북한에서 당 간부들은 잘먹고 잘산다”고 전하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이 입국 기자회견에서 “한총련의 친북 투쟁이 북한의 선전선동을 돕는 결과를 초래해 국민 여러분께 사죄한다”고 밝혔을 때는 충격을 넘어 “하늘이 노래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북한의 식량문제가 미국의 경제봉쇄나 옛소련의 몰락 탓이 아니라 체제 내부의 문제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북한을 닮아가야 할 체제로 여겼던 과거를 뒤로 하고, 김정일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쪽으로 사상이 급선회했다.

“87년 민주화 일군 건 자랑스럽지만…”

최씨는 요즘 아침 9시 직장인 자유주의연대 사무실로 출근해 밤 10시30분 퇴근한다. 최근에는 ‘세금폭탄 반대’ 시위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을 맡아, 회원 관리는 물론 관련 단체들과 접촉하는 일을 맡고 있다.

“북한을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로 바꾸려는 것처럼 남한에서도 이 원칙이 확고해지기를 바랍니다. 최근 얘기되고 있는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등은 시장경제 시스템에 맞지 않는 과도한 과세이며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입니다.”

그는 이제 시장경제 신봉자다. 시장경제를 채택해 실패한 나라도 몇곳이 있지만, 채택하지 않은 나라는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업이 성공을 거둬 일자리를 제공해야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과거 관심이 높았던 사회복지나 분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에게 87년의 경험은 ‘계륵’과 같은 존재다.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방법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민주화를 일궈낸 것에 대해 그 세대 전체가 자랑스럽게 여길 만합니다. 민주화의 형식에 기여한 노력과 그때 느꼈던 사람들 사이의 감정은 고귀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시즘 등이 채택됐는데, 이런 이념에 경도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현대사에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북한사회 미화에는 실망 느껴”

20년을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대중적인 운동인 동시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기운 혁명주의적 성격도 있었다. 당시의 경험은 다른 세대에 없는 독특한 문화를 제공했다. 그중 하나가 자기 헌신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노동운동 등 현장에 뛰어들고 직업적으로 운동을 꿈꿨다. 또 하나는 국가 발전에 대한 관심이다. 개인적 삶보다는 국가라는 단위를 생각했다. 세속적인 표현으로, 정치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큰 틀 속에서 보면 20대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싶다.” 홍진표(44)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6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향상에 대단히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개인적으로 영국의 명예혁명에 견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86년 구속돼 감옥에 있었는데, 독방에 갇혀 정보를 얻지 못해 일희일비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세대에게는 정치사회적인 관심을 갖게끔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빠질 우려도 있다. 물론 나에게도 해당된다.” 김영환(44) 〈시대정신〉 편집인

“거대담론으로 분단문제, 독재문제 등에 저항하고 참여했다. 최선을 다한 20대 시절이었다. 이후 한총련 중앙 활동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비민주적인 행태를 봐 왔다. 북한 사회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모습에 실망도 느꼈다.” 홍성이(38) 바른사회시민회의 상임정책위원

“87년은 학생운동을 떠나 노동운동에 뛰어든 해다. 그래서 6월 항쟁보다는 7~8월 노동자 대파업투쟁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80년 광주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를 향한 저항은 지극히 정당했다. 다만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목적의식적인 혁명적 노동운동을 추구했는데, 지금 와서는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지호(44) 자유주의연대 대표


시청광장의 목소리…분노서 환희로 중심이동
그 자리

시청광장
시청광장
만7920㎡. 서울시청 앞 광장과 주변 도로가 시민들로 가득 찼다. 인산인해는 광화문 네거리 너머까지 이어졌다. 1987년 시위 도중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당시 20살)씨의 장례행렬이 그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도심 응원전이 그랬다. 한번은 슬퍼서, 한번은 기뻐서, 서울시청 앞은 뜨거웠다.

87년 7월9일 시청에는 조기가 내걸렸다. 누군가 시청 옥상의 태극기를 내려 애도를 표했다. 연세대에서 출발한 장례행렬은 신촌과 서소문을 거쳐 서울시청 앞에 도착했다. 그곳은 광주로 떠나는 운구의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이종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팀장은 “한 청년이 빗물통을 타고 올라가 태극기를 내린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그때 시청앞 광장은 시민·학생들이 서로 얼굴과 눈빛을 교환하는 최고의 해방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시청앞 광장은 늘 차량으로 북적이는 도로였지만, 이처럼 때로 시위대에 점령돼 시민들의 목소리가 오고가는 열린 마당으로 변했다. 한·일 월드컵 때는 ‘붉은 악마’들에 다시 점거당해 축제 마당이 됐다. 2004년 5월1일부터는 아예 시민에게 개방됐다. 도로 위에 잔디가 깔리고 ‘서울광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5일 저녁에도 시청 광장에는 오색찬란한 조명이 반짝이고, 스케이트장에서 얼음을 지치는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했다. 한편에선 철거에 항의하는 시위나 각종 1인 시위가 이어졌다. 서울광장은 이제 시민의 놀이터이자, 할말 있는 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광장이 됐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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