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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전문] 명동성당안 1천명…경찰이 해산 막아
전두환 “군 동원” 엄포에도 국본 “6·26 강행”

등록 2007-06-10 19:26수정 2007-06-12 17:08

1987년 6월항쟁 일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6월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 1987, 그후 20년 ③ 다큐6월

1987년 6월항쟁 일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예고없던 6일간의 농성투쟁

 1987년 6월9일 오후 4시40분 연세대학교 정문

“빠바바바바바방” “쐐애액!” “타다다다다닥”

전투소조(일명 솟대·소크·전조·시시) 학생들이 화염병(일명 꽃병)을 던지자마자 경찰쪽에서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했다. 길 건너편의 사복체포조(일명 백골단)들이 동시에 교문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전투소조였던 도서관학과 86학번 이종창도 화염병을 던지자마자 달려오는 사복조를 보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날 이상하게 경찰쪽이 공격적이었다. 보통은 최루탄을 쏜 뒤에 달려오는데, 그날은 최루탄을 쏘는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종창이 정신없이 교문 안으로 5~10m 뛰어들었을 때 뿌연 최루탄 연기속에서 무엇인가가 보였다.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양 팔로 쓰러진 사람을 안고 계속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부상자의 완전히 처져 있어서 무척 무겁고 힘들었다. 사진기자들이 계속 우리를 쫓아오며 사진을 찍어댔다. 다친 사람을 돕지 않고 사진만 찍고 있는 사진기자들이 원망스러웠다. 왼쪽으로 첫번째 좌회전 하는 곳까지 부상자를 끌고가자 85학번 이종혁 선배 등 2~3명이 달려와 넘겨받았다. 너무 힘이 들어서 잠시 뒤로 빠졌다가 다시 전투소조에 합류했다.

이날 집회가 모두 끝난 뒤 이종창은 자신이 끌고 들어온 부상학생이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이란 사실을 알았다.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였다. “처음에 한열이는 의식이 있었다. 몸은 처져 있었으나, ‘뒤통수가 아프다’는 등 말을 해서 그렇게 많이 다친 줄을 몰랐다. 경찰이 쫓아오는 걸 경계하면서 물러나던 상황이어서 한열이의 상태를 살필 여유도 없었다.” 이종창은 현재 연세대 중앙도서관 한국학자료실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찰이 쏜 총류탄(SY-44)에 맞은 이한열은 뒷머리의 피가 얼굴에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났다. 바로 옆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을 때까지만 해도 이한열은 “뒷통수가 아프다” “나 괜찮아?” “온몸이 마비돼” 등 말을 했다. 그러나 오후 5시30분께 이한열은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떠보라는 의사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였다.

6월10일 낮 12시30분 서울 잠실체육관

“민정당(민주정의당)은 민족에게 정을 주는 정당, 통민당(통일민주당)은 민족에게 고통을 주는 정당”

당시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이 한 마디로 1만1천여명의 민정당 대의원과 초청인사들이 모인 잠실체육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전라도 광주(출생지는 장성) 출신이었던 김병조는 이 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결국 야당과 국민에게 사과하고 한동안 방송도 중단해야 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의 부인은 “당시 방송하는 사람들은 어디든 가라면 가야 했고, 무엇이든 하라면 해야 했다. 본인이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으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가 됐다. 해명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날 막간 행사는 문화방송에서 담당했고, 연주도 문화방송 관현악단에서 맡았다.

이날 민정당 전당대회에서는 투표가 끝난 12시30분께부터 1시간30분 동안 임성훈의 사회로 조영남, 조용필, 정수라, 이선희 등 당대 최고 인기 가수들이 12명의 치어리더들과 함께 나와 노태우의 18번인 <베사메 무초> 등 노래로 흥을 돋우웠다. 모인 사람들을 가장 감개무량하게 만든 노래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었다. “하늘에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후보가 선출됐습니다” 개표가 끝난 오후 2시 채문식 전당대회장의 발표에 잠실체육관은 박수와 환호로 떠나갈 듯했다. 대의원들이 모두 일어서 “전두환! 노태우!”를 연호했고, 천장에 매달린 2개의 대형 바가지가 터지면서 꽃비가 내렸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손을 잡아 번쩍 들었다. 노태우는 후보수락 연설에서 폭력적 집회·시위에 단호히 맞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 역사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며, 폭력적 급진좌경 사상과 행동은 자유민주주의가 설땅을 없애고, 마침내 4200만명의 공동체를 무너뜨릴 위험성마저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체제의 수호 발전에 관해 추호의 흔들림이 없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

1987년 6월11~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대학생·시민들의 농성투쟁은 6·10항쟁의 열기를 이어갔을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사무직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사건이었다. <88보도사진연감>
1987년 6월11~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대학생·시민들의 농성투쟁은 6·10항쟁의 열기를 이어갔을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사무직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사건이었다. <88보도사진연감>
6월10일 낮 12시 서울 성공회 대성당

“뎅 뎅 뎅 뎅 뎅…”

유시춘과 지선은 오전 11시50분께 좁은 성공회 대성당 종루로 기어올라갔다. 통로나 종루가 너무 좁아서 여러 사람이 함께 올라갈 수 없었다. 낮 12시가 되자 저 아래쪽에서 성공회 관계자가 줄을 흔들어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계훈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의 제안한 대로 해방 뒤 분단과 독재의 42년을 끝내자는 42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성당 주변의 비둘기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날씨가 너무도 청명해서 스피커의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는 기억이 나네요.” 유시춘의 말이다.

유시춘이 쓴 성명을 지선이 읽고 유시춘은 마이크를 받쳐들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주최하기 위해 모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입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같은 시각,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과 무교동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같은 내용의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나 대회장에 모인 국본 참석자는 계훈제, 박형규, 양순직, 김명륜, 송석찬, 이규택, 지선, 진관, 제정구, 유시춘, 김병오 등 20여명에 불과했고, 성공회 신부들을 합해도 40여명이었다. 오후 늦도록 국민대회장인 성공회 대성당은 경찰력과 경찰버스에 갇혀 고립무원이었고, 서울 도심도 적막강산이었다. 정부는 서울 도심과 주요 대학 앞에 160개 중대 2만3천여명의 경찰력을 배치했고, 퇴근시간에 지하철 1~2호선의 도심 역 11개를 폐쇄해 무정차 통과하도록 했다. 경적 시위에 대비해 버스와 택시들의 경음기를 떼도록 했고, 시민들의 애국가 부르기를 막기 위해 관공서 국가 하강식 방송도 금지했다.

출구봉쇄 새벽까지 충돌…밖에선 구출투쟁
함세웅 신부가 안전귀가 보장받고 ‘집으로’

6월10일 오후 6시 서울 도심

“빵빵, 빠앙빠앙, 빵빵빵빵…”

여기저기서 차량들이 경음기를 울렸다. 애초 이날 시위는 국기 하강식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면서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조처로 애국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경적 소리만 도심의 정적을 깼다. 이원배 서울대 임시대표자회의 대표는 오후 4시께 신림동에서 도심으로 나가는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다. 맨 뒷자리에 몸을 구겨놓고 있다가 5시30분께 퇴계로 남대문 시장 부근에서 내렸다. “수배자 신분이라 검거될 위험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날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골목과 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오후 6시를 기다렸다.”

마침내 6시가 됐다. 6월인데다 표준시를 1시간 당기는 ‘서머타임’이 실시돼 오후 6시라고 해도 밖은 대낮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거리로 뛰어들어 주동을 뜨지 않았다. 신세계 옆 퇴계로엔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으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수배자였던 이원배가 하릴없이 총대를 맸다. “청년 학우 여러분, 우리가 왜 이곳에 왔습니까? 왜 박종철 열사는 남영동의 차가운 대공분실에서 죽어가야 했습니까? 우리는 전두환 군사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학우 여러분, 우리 함께 싸웁시다. 거리로 나섭시다.”

5분쯤 지났을까? 점차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박종철을 살려내라!” 버스와 택시들이 학생들을 지지하는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불과 30여분 뒤엔 모든 차량들이 인파에 묻혀 멈춰서야 했다.

우상호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도 학생들을 먼저 내보낸 뒤 슬그머니 롯데백화점 앞으로 나갔다. 이인영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의 검거로 인해 총학생회장들은 학교에 머물기로 했으나, 그도 약속을 어겼다. “오후 6시에 내가 주동을 뜨고 대로 뛰어들자 학생 50명 정도가 따라서 거리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주춤대고 있었다.” 처음 뛰어든 학생들이 최루탄 세례를 받고 골목으로 숨어들자 골목은 대만원이었다. 모두가 거리 시위하러 나온 학생들이었다. 골목에서 대오를 정비한 뒤 다시 거리로 뛰어나갔다. 이렇게 대로와 골목을 오가면서 시위 참여자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도심 여기저기서 산발적 거리시위를 벌이던 서울의 학생·시민 2만여명은 오후 7시30분께 경찰력을 남대문쪽으로 밀어내면서 신세계백화점 앞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전경 1개 소대 40여명이 고립됐고, 무장해제 당했다. 학생들은 눈물·콧물 범벅이 된 이들을 분수대에서 씻긴 뒤 함께 ‘아침이슬’을 불렀다. 일부 전경들은 최루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감동해서인지 눈물을 흘렸다. 이날 시위에 전국 22개 도시의 514곳에서 연인원 50여만명의 학생·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3831명이 연행됐다.

6월10일 밤 10시 신세계백화점 앞

누군가 명동성당으로 가자고 했다. 서울시립대생 정원오도 학생들의 물결에 쓸려 명동으로 향했다. “그날 시위가 기대보다 규모도 컸고, 시민들이 박수를 쳐주는 등 호응이 좋았다. 그런 분위기에 고무돼 계속 시위를 하다보니 늦어져 버렸다. 애초엔 밤 10시까지 학교로 돌아가는 택(전술)이었다. 어느 순간 시위대 숫자가 많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 누군가 명동성당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처음에 정원오와 함께 들어간 학생들은 200~300명 가량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1천명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이날 밤 11시께 명동성당의 시위대가 다음 날의 등교와 출근을 위해 농성을 해산하고 성당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자, 경찰은 통로를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쐈다. 시위대도 돌을 던지며 맞섰고, 새벽까지 계속된 이 충돌로 인해 시위대는 농성을 해산할 수 없었다. “명동성당에서 모인 학생들끼리 의논을 했는데, 일단 하룻밤 철야를 하고 11일 각 학교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1일 각 학교로 전화를 하니 오히려 학우들이 ‘구출·진격 투쟁’을 벌이러 명동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명동성당에 남아있기로 했다.” 밖의 학생들이 구출투쟁에 나서면서 경찰의 봉쇄는 더 강화됐다.

6월11일 낮 12시 청와대 우수학회 초청 오찬

“어제도 공산당식 게릴라식으로 데모를 했어요. 내가 7년 동안 대통령 하면서 군대를 한번도 안 써먹었어요. 지금도 명령을 해서 비상계업을 하는지 위수령을 하면 싹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둑을 두다가 잘 안 된다고 자꾸 쓸고 하면 바둑은 안 늘고 성격만 나빠집니다. 바둑에 지더라도 연구를 해서 페어 플레이로 나가야 합니다. 가급적 군부 동원을 안 하고 정치역량과 정치 타협을 통해서 하려고 하는데….” 전두환 대통령은 전날 국민대회에 대해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전두환은 이날 저녁 6시30분에도 수석비서관 부부들을 초대해 만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명동성당 농성을 장기화하도록 봉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방금 나오면서 뉴스를 들으니 명동성당에 1천여명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건국대 사태 때도 그랬지만, 포위해서 가둬놓고 성당측에서 데라가라고 할 때까지 아주 장기적으로 놓아두는 것도 좋겠어.… 이승만 대통령이 나쁜 전통을 만든 게 하나 있어. 학생 데모로 정권이 넘어가는 선례를 남긴 거야.”

6월11일 오후 2시 서울 명동성당

나도은 당시 명동청년회 문화위원장은 명동성당에서 집회중이던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들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전두환·노태우·레이건의 이름을 쓴 허수아비를 태우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를 외쳤다. 그때였다. 경찰이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달려들었다. 경찰은 학생들이 명동성당 앞 좌우 50m에 세운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렸고, 성당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학생들은 황급히 명동성당 안으로 피하며, 성당 바닥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반격했다. 순식간에 명동성당 일대가 최루탄, 화염병 연기로 자욱해졌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성당바닥과 외벽도 엉망이 됐다.

이 직후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신부는 성당 외곽으로 나가 마이크를 집어들고 경찰을 향해 “엄숙한 성전에 들어와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천주교회는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시위 학생들을 보호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전두환과 경찰의 강경한 진압이 천주교회와 농성 학생들의 연대를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이로 인해 해산 직전의 명동성당 농성이 15일까지 연장됐다. 천주교회는 사제단 회의 등을 통해 12일 명동성당에서 ‘민주화와 성역 침해에 대한 항의 기도회’와 ‘나라를 위한 특별 미사’를 열기로 했다.

나도은은 당시 경찰이 애초부터 명동성당 농성 학생들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마 몰아놓고 봉쇄했다가 전원 연행하려고 했던 것 같다. 천주교회는 처음에 정상적 사목 활동에 지장이 있으니 나가달라고 했지만, 11일 오후 경찰의 행위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우리 안에 들어온 양들을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6월11~13일 명동성당

“우리는 애국 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을 적극 지지합니다. 여러분의 굽힘 없는 투쟁으로 우리 시민들 가슴속에도 민주화의 소망이 커지고 있으며, 함께 동참할 방법들을 찾기 위한 토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비록 작은 정성이고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85명이 모금한 돈입니다. 민주화와 민족자주의 밑거름으로 써 주십시오.”(전재주 등 외환은행 직원 85명)

12일 남을우 당시 비시카드 노조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명동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비시카드 사무실은 시청 앞 프레지던트호텔 옆이어서 명동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당시 한국노총의 ‘4·13호헌 지지 성명’이 나와 화가 나 있었고, 조금이라도 학생들 농성에 도움을 주고 싶어 점심·저녁 때마다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명동성당으로 가던 길에 경찰에 붙잡힌 한 대학생을 만났다. 끌고 가려는 경찰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학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남을우 등 노조 간부들은 경찰에게 “왜 잘못도 없는 학생을 끌고가냐?”고 강하게 항의했다. 주변의 다른 시민들까지 소리치며 뜯어말렸고, 학생은 경찰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남을우와 노조 간부들은 명동성당 앞의 학생들 집회에 참여해 박수를 치며 함께 구호를 외쳤다.

당시 종로5가에 있던 대한보증보험의 김국진 노조위원장도 이때 동료들과 명동에서 자주 맥주를 마셨다. 저녁에 명동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고는 명동성당으로 가서 학생들에게 박수쳐주다가 직접 농성단에 들어가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당시엔 인도에 올라서면 시민이고 차도에 내려서면 시위대였다. 인도에 섰던 ‘넥타이 맨 사람들’이 점차 차도로 내려서는 게 눈에 보였다.”

“언니, 오빠들에게 보냅니다. 많은 도움이 못되어 죄송합니다. (돌려받은) 도시락에 든 쪽지를 받고 여러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꼭 보고 싶은 언니, 오빠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웃으며 보고 싶습니다. 안녕. 동생들이 보냅니다.”(당시 농성단에게 도시락을 전달했던 계성여고 학생들의 쪽지)”

11일 낮부터 명동성당 수녀들이 김밥과 빵을 학생들에게 가져다줬다. 11일 저녁부터는 이미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상계동 철거민들이 학생들에게 밥을 해주기 시작했다. 특히 12일 낮 천주교회의 중재로 명동성당과 그 주변에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경찰은 최루탄을 포기하기로 했다. 농성단이 시민들을 상대로 평화적인 선전전을 벌이는 것이 더 자유로워졌다. 12일부터는 계성여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점심 도시락을 시위대에 전달했고, 명동과 남대문의 상인들이 옷과 이불, 술, 담배까지 가져다줬다. 남을우는 “시민들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6월13일 오전 9시10분 청와대 시국관계 책임자 회의

“일부 시민이 동조·가담하거나 고무하는 것은 심각한 현상입니다. 6월11일엔 주변에서 관망하고 손뼉을 치거나 경찰에 야유를 보냈고 12일엔 군중이 (명동성당 농성단에) 합세했습니다. 12일 오후 2시경엔 시위대가 약이 필요하다고 하자 시민들의 즉석 모금이 있었습니다. 진압 경찰이 주변 군중들의 야유로 사기면에서 위축돼 있습니다. 시위 진입을 위한 최루탄 사용에 비판이 많습니다.”

고건 내무장관은 “치안 책임자로서 죄송하다”며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하기 시작한 것이 심각하다고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이날 오전 전두환은 관계 장관들과 명동성당 학생농성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의외로 ‘인내’를 강조했다. “내가 늘 소망하는 것은 임기만료 8개월을 앞두고 비상조치라든지 계엄선포 같은 이런 일 없이 우리가 좀 괴로워도 평화적 정부 이양의 선례를 남기고 넘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쉬운 방법은 계엄을 해서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 방법인데, 우리가 늘 그런 쉬운 방법을 택해선 안 좋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7년 가까이 여러번 구런 구상을 했지만 그때마다 참아왔는데, 여러분이 슬기를 모아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6월14일 오전 1시30분 청와대

“아버지, 어디 가세요?” “명동성당 가려고 한다”

전두환은 이날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둘째 아들 전재용은 “명동성당요? 명동성당에 왜 가세요? 아버지, 잠깐만 앉아보세요”라며 붙잡았다. 전두환이 설명했다. “성당이 정신적 구원이란 본연의 역할을 해야지 좌경분자의 거점이 되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성직자들에게 그런 종교적 장소는 보호해 줄 수 없다고 얘기하려고 한다. 또 내 얘기를 듣지도 않겠지만 학생들한테도 내 능력되는 대로 훈계도 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설혹 나를 납치하면 경찰이 나를 구출할 명분이 있지 않겠냐. 오늘 밤에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자 전재용은 다시 생각하라며 말렸다. “거기서 아버지가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외국에서 볼 때 나라 체면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생각해보세요.” 전재용은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다가 전두환에게 한잔 따라줬다. 아들의 만류에 결국 전두환은 이날 새벽 명동성당행을 포기했다.

이런 전두환의 행동에 대해 김성익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즉흥성이 많은 성격상 얼마든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성익은 “전 대통령은 그전에도 새벽에 정부청사나 군부대나 민정당사를 불쑥 찾아간 일이 여러번 있었다. 명동성당이 무슨 반체제 집단 소굴이 아니고, 신부·수녀들이 있는 곳이니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현장에 가서 대화가 이뤄지면 극적인 해결도 가능하다. 아마도 충격적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내려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신 전두환은 이날 아침 9시30분 청와대 상춘재 안보장관·군·치안책임자 회의를 주재한다. 이날 회의에서 전두환은 군 출동 준비와 명동성당 봉쇄 해제라는 강온 양면 전술을 내놓았다. “군은 비상시에, 계획에 의거해 부산은 00사단이 주요 대학에 다 들어가고, 서울은 중심부인 고대, 연대 등 몇 개 대학에 병력을 주둔시켜서 사회가 전부 안정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명동성당은 오늘 자정을 기해 전부 풀어주시오. 안 잡을테니 나가라고 해요. 시경국장이 추기경을 만나자고 해서 오늘 저녁에 다 내보내라고 해요. 그러면 경찰을 철수시키겠다고 해요.”

6월14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겠습니다. 학생들의 농성을 해산해 주십시오.” “학생들의 연행이나 구속도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어도 됩니까?” “청와대의 뜻입니다.”

이날 오후 2시 함세웅 신부는 조종석 치안본부 시경국장을 명동성당 앞 로열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조 국장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달하고 성당쪽의 협조를 요청했다. 함세웅은 조종석에게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를 두세차례 다짐을 받은 뒤 헤어졌다. 명동성당으로 돌아온 함세웅은 긴급히 농성단 대표자들을 모아 이런 사실을 전달하고 해산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표들은 오후 6시부터 4시간 동안 마라톤 회의를 벌인 끝에 잠정적으로 농성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전체 농성자들의 토론 결과에 따르기로 했다. 오후 10시30분께 경찰은 주변의 1500여명 경찰력을 철수했다.

공은 전체 농성단 회의에 넘어왔다. 15일 밤 1시부터 조별 토론이 벌어졌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다. 결국 아침 8시께 투표에 붙여졌다. 1차에는 반대가 많았으나, 과반수에 못 미쳤고, 2차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 함세웅이 나섰다. 함세웅은 “여기서 해산하지 않아서 결국 정부의 강경진압을 부를 경우 전체 민주화 운동에도 타격이 될 수 있다. 이번 농성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다음 투쟁으로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는 내용으로 간곡히 설득했다. 함세웅의 설득 뒤 3차 투표에서 119대 94로 농성을 푸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6일 동안의 명동성당 농성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6월18일 오전 9시2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현재로서 해결책은 직선제를 수용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을 수 있습니다.”

전날부터 전두환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해놓고 있던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은 이날 아침부터 전두환을 찾아가 열을 올렸다. “민심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잘만 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 후에 최선을 다해 싸우고, 지면 깨끗하게 정권 이양하고 야당하면 됩니다. 김대중도 연금 해제하고 정치인 사면·복권도 함께 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수습하다 실패하면 이승만 대통령 때처럼 어려워집니다. 죽을 각오로 모든 걸 다 던지면 살 수 있습니다.” 김용갑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성격이 급한 전두환은 말을 끊고 지시했다. “야, 그러면 당장 노 대표에게 가서 나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설명해라. 특명이다.” 이날 김용갑은 노태우 후보에게 이 내용을 설명했고, 이어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을 잇따라 만났으나, 반응은 대체로 냉랭했다. 그러나 김용갑은 19일에도 전두환을 만나 다시 설득했고, 전두환은 이날 저녁 노태우와 직접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김용갑이 전두환에게 직선제를 진지하게 건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었으며, 노태우 정부의 핵심이었던 박철언은 김용갑의 건의에 따라 직선제가 검토됐다는 것은 좀 과장됐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직선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당시에 노태우 캠프의 시나리오에도 호헌 유지와 호헌 수정, 직선제 수용 등 세 가지 방안이 있었다. 그전의 체육관 선거 체제로 계속 가야 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노 모두 이미 직선제까지도 검토하거나 고민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6월18일 오후 6시 부산 서면 로터리

“호헌 철폐” “독재 타도”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단결하여 민주노조 결성하자!”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동래지역 위원장이었던 김일석은 이날도 부산 국본에서 시위 계획을 짜고 전달한 뒤 서면로터리쪽으로 향했다. 1979년 부마(부산·마산) 항쟁의 진원지인 부산의 시위는 17일께부터 거의 시민봉기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는 상태였다. 특히 부산대에서 출정식을 치른 대학생들과 퇴근 때가 된 사상공단의 노동자들이 뭉치면서 오후 6시께 서면로터리에 모인 군중은 30만명에 이르렀다.

“부산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번화한 서면 로터리와 이와 연결된 대로들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군중이 가득찼다. 어마어마한 군중의 규모에 밀려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일석의 말이다. 당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중이던 고호석 국민운동 부산본부 사무국장·상임 집행위원도 “시위대 안에서 어느쪽을 봐도 사람 물결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인파는 거대한 용과 같았다. 부마항쟁에 이어 우리가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밤 10시께 서면의 시위대는 촛불을 켜서 들기 시작했다. 어둠속의 시위대가 촛불시위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촛불시위대가 부산일보와 한국방송공사쪽으로 가기 위해 좌천동 고가도로(일명 ‘오버브리지’)를 통과하려고 하자, 계속 밀리기만 하던 경찰이 갑자기 반격에 나섰다. 김일석은 “경찰이 서면로터리에서 강하게 저지하지 않는 이유는 밤에 시위대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특히 고가도로 위에 있던 시위대에게 물을 쏟아붓듯 최루탄을 쏴댔다. 고가도로에 갇힌 군중들은 숨이 막혀 죽을 듯한 공포를 느꼈고, 가능한 한 연기가 덜한 난간쪽으로 몰렸다. 이때 고가도로 아래쪽에서 ‘퍽’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떨어져 숨졌다. 28살의 이태춘이었다.

분노한 군중들은 밤 12시께 경찰 저지선을 뚫었고, 돌과 화염병으로 한국방송공사를 공격해 집기 일부를 태웠으며, 일본영사관의 외부 유리창 대부분을 깨뜨렸다. 부산 시민들의 시위는 이렇게 새벽까지 계속됐고, 새벽녘엔 200여대의 택시와 화물트럭까지 가세해 경적 시위를 벌였다. 여성단체들이 주최한 ‘최루탄 추방의 날’에 부산은 도심 전체가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이날 전국에서 150여만명이 시위에 나섰고, 1487명이 연행됐다.

6월18일 밤 12시 서울 보안사령관 집무실.

“때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보안사령관입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입니다. 부산 시위 사태가 위급해서 경찰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부산 시청과 경찰서 등이 시위대에 의해 불바다가 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 각하를 깨워서라도 군 투입을 건의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예, 검토해보겠습니다.” “때르릉” 또 전화벨이 울렸다. “치안본부입니다” “내무부입니다” “국방부입니다” 등의 치안·안보 관련 부처 고위 인사들로부터 당시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전화가 빗발쳤다. 고명승은 부산 현지 상황을 검토한 뒤, 심각한 상황이지만, 군을 투입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명승은 19일 새벽 청와대에 전화했다. “대통령을 깨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6월19일 오전 10시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을 내려보내고, 2개 여단은 전남·광주로 돌리라. 부산은 1개 사단과 1개 연대를 보내서 1차로 부산과 대구, 마산의 시위사태를 진압해야겠어. 서울은 4개 연대를 배치해서 주요 대학에 배치하도록 해.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입하도록 해야 돼요. 군에 가스탄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가.”

전두환의 지시에 이기백 국방부 장관은 “20일분을 갖고 있습니다. 풀 가동을 지시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전두환은 이날 안기부장,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군 고위 관계자들을 소집해 비상조치에 따른 군 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했다. 안무혁 안기부장은 “데모 학생들에 대한 작전을 25일까지 끝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두환은 “부산·마산·대구의 이 영남 삼각형이 문제”라며 “부산엔 군 병력을 투입하면서 통금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비상조치 계획과 군 출동 지시는 오후 4시30분 유보됐다. 이것에는 미국의 강한 영향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왜냐하면 유보 지시에 앞서 전두환은 오후 2시께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를 만났고, 릴리는 전두환에게 레이건의 친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인 존 오버도퍼의 <두개의 한국>이란 책을 보면, 레이건은 친서에서 전두환에게 “내년 대통령의 권한을 평화적으로 이양하겠다는 각하의 역사적 결단을 민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평가하며 적극 지지합니다. 대화와 타협을 도모하기 위해 각하가 추진하는 모든 조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라고 밝혔다. 또 전두환의 퇴임 뒤 미국 방문을 주선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 즈음에 한국을 방문한 개스틴 시거 국무부 차관보도 25일 한국을 떠나면서 계엄선포 반대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당시 권력 핵심부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두환이 군을 동원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김성익은 1992년 펴낸 <전두환 육성증언>에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상대에게는 군부 동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며 “심리 전술을 통치에 원용한 사석작전”이라고 평가했다. 김성익은 또 “당시 전두환은 올림픽을 성공하면 국가도 엄청 발전하고, 북한과의 경쟁에서도 완전히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며 “올림픽 성공에 방해가 되는 군 동원은 전두환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존 오버도퍼도 <두개의 한국>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필위원장이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면 올림픽 개최지를 변경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 결과 남한 정부는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자제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노 후보쪽의 핵심이며, 안기부장 특보였던 박철언도 “군 투입 발언이나 지시는 야당이나 재야, 학생들을 자제시켜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 했던 전두환의 고도의 통치술”이라고 평가했다.

6월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천주교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원

이날 밤 국본 상임 공동대표·집행위원 연석회의가 열렸고, 민통련 상임 집행위원회는 6월26일에 국민평화대행진을 열자고 제안했다. 민통련의 사무처장 성유보는 “군대가 동원되고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물러나면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민주화를 하려면 국민들이 쿠데타를 뛰어넘어야 한다. 저들이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도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벌여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민통련은 6·26집회를 그대로 추진하겠다”고 강행론을 폈다. 민통련 사무차장 이명준, 정책실 차장 이해찬, 서울 민통련 의장 이재오, 민가협의 인재근, 변호사 이상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날 야당과 개신교 대표들은 신중론을 들고 나왔다. 상도동계 최형우, 김도현은 “오늘 와이에스가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으니 결과를 좀더 지켜보자. 아직 시간이 있는 것 아닌가? 강경하게 나아가다 전두환이 군을 동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동안 민통련의 노선에 동의해왔던 양순직, 한영애, 설훈 등 동교동계도 이날 따라 조용했다.

이명준이 설훈을 따로 불러 “왜 동교동계까지 갑자기 신중론으로 돌아섰냐?”라고 물었다. 설훈의 대답이다. “디제이가 나를 서재로 불러서 책을 고르더니 ‘노란 포스트잇을 붙이라’고 하더라.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책들을 (내가 갇힌) 교도소에 넣어달라’고 하더라. 디제이가 상황을 이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다.” 당시 야당은 전국적 시위가 계속되면 전두환이 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우려 때문에 6·26평화대행진을 강행하는 문제에 신중해진 것이었다. 개신교계의 문동환, 이우정 등도 역시 신중론을 폈다.

민통련은 “설령 여야 영수회담이 열리더라도 6·26을 추진하는 것이 야당의 협상력을 높여줄 것이다. 야당과 개신교계가 반대하면 민통련과 학생들만이라도 독자적으로 6·26을 밀어붙이겠다”고 주장했다. 민통련쪽은 야당쪽에서 우려하는 ‘군 동원 가능성’에 대해 “군을 동원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다, 군을 동원해도 전국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총을 쏠 수 있겠나? 만일 총을 쏜다면 ‘광주학살의 전국화’인데, 올림픽을 앞두고 과연 전두환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나? 그럴 가능성은 없다. 6·26을 그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나아가 이해찬은 “1980년에 서울역에서 회군을 했기 때문에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이번 회군하면 전국에서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국본이) 총을 맞더라도 그대로 6·26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길고 격렬한 논쟁 끝에 22일까지 전두환의 반응을 지켜본 뒤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22일 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상임 공동대표·집행위원 연석회의가 다시 열렸다. 야당쪽은 “영수회담 전에 평화대행진 일정을 발표하면 와이에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정국이 경색된다”며 “평화대행진 계획 발표를 늦추거나 일정 자체를 늦춰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개신교쪽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민통련을 포함한 국본의 다수는 그대로 추진하기를 주장했고, 결국 ‘6·26평화대행진’ 일정을 예정대로 23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6월19일 저녁 청와대

“노 대표, 직선제를 수용하는 게 어떻겠소?” 전두환이 말을 꺼냈다. 너무 갑작스럽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노태우는 완곡히 거부했다. “이제까지 나라를 위해서나 당론으로나 내각제가 좋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정치인의 노선이 왔다갔다 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때 이미 전두환은 직선제를 수용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강권하지는 않았다.

전·노 두 사람은 6월22일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다시 만났다. 노태우는 며칠 동안의 고민끝에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호헌이나 내각제로는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거나 뒤집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예, 각하, 직선제 수용을 검토하겠습니다.” “그래요.” 마음을 돌린 노태우는 한발 더 나아간 제안까지 내놓았다. “직선제를 받아들일 경우,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위 관련 구속자 석방도 함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통련과 야당이 전두환의 군 동원에 대한 우려로 6·26평화대행진 강행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 바로 그때,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직선제를 검토해 결정한 상태였다. 민주화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두환·노태우 군부 세력이 반전의 기회를 잡은 순간이었다.

“병력 배치” 6시간만에 “보류” 심리전술
민통련등 평화대행진 신중론 맞서 강행

6월24일 오전 10시30분 청와대

“오늘 날 만나자고 했는데, 나만 만날 것이 아니라 김대중을 당장 사면·복권해서 나와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합시다. 원한다면 노태우 대표가 참석해도 좋습니다.”

이날 오전 김영삼은 청와대를 찾아가 전두환과 만나 이렇게 제안했다. 19일 김영삼이 제안한 여야 영수회담을 전두환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전국에서 시위가 보름째 계속되던 가운데 이날 김영삼은 전두환에게 “이대로 가면 계엄이든 어떤 비상조치로든 수습할 수 없으며, 자멸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만이 나라가 살고 당신이 사는 길”이라며 △4·13호헌 철회 △직선제 수용 또는 선택적 국민투표 실시 △언론자유 보장 △6·10대회 관련자 석방 사면·복권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 등을 요구했다. 나아가 김영삼은 “내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회담 결과를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김영삼은 임박한 민주화 선언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의 생각은 당연히 달랐다. 이미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권유하고 발표 준비까지 시킨 그로서는 김영삼의 요구에 따라 민주화 일정을 내놓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중요한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이미 노태우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됐으니 노태우 후보와 논의해주십시오”라고 주문했다. 김영삼은 그때마다 “노태우 대표는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대통령이 책임자인데 왜 미룹니까?”고 다그쳤다. 오전 시간 내내 회담을 벌이고 김영삼의 요구로 오찬까지 함께 들었지만 전두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미 직선제를 결심한 전두환은 급할 게 없었고, 회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김영삼이 오히려 쫓기는 쪽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회담 뒤 김영삼은 “회담이 결렬됐다”고 선언했고, 청와대와 정부는 “대통령이 4·13호헌을 사실상 철회했으며,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고 앞으로 사면·복권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두환은 선거를 치러야 하는 노태우에게 직선제 수용의 업적을 돌릴 생각이었다.

6월25일 오전 8시20분 연희동 노태우의 집

노태우는 결연한 표정으로 손아래 처남인 박철언에게 말했다. “시국 타개 종합 방안을 마무리해 곧 독자적으로 발표해야겠어. 대통령 직선제,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 사범 석방, 언론기본법 폐지 등을 포함시키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내가 독자적으로 선언하고 나중에 대통령이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대통령과 합의했어. 시간을 끌면 보안이 안 되니 급히 발표문안을 준비하시오.” 노태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박철언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은 두 가지를 강조했다. “이번 시국 타개 방안에는 야당과 국민들이 요구하는 사항을 모두 담는 과감하고 역사적인 선언이 돼야 합니다. 또 대표님의 독자적인 결단으로 비쳐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선언 내용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의지도 밝혀야 합니다.” 안기부장 특보실로 돌아온 박철언은 강재섭 연구실장 등 3명의 연구관을 불러 구상한 내용을 불러줬다. “셋이서 지금 즉시 극비리에 의견을 취합해 오늘 오후 3시까지 초안을 정리해오도록 하세요.”

6월26일 오후 전국 37개 시·군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6월항쟁 가운데 최대인 전국 33개 시·4개 군에서 180여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관공서 4곳과 경찰서 2곳, 파출소 29곳, 민정당 지구당 4곳이 파괴됐고, 3467명이 연행됐다. 6월10일 이후 이날까지 17일 동안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는 2145건이었으며, 시위대를 향해 발사된 최루탄 35만발이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린 1987년 6월26일 서울역 부근에서 대학생·시민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88 보도사진연감>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린 1987년 6월26일 서울역 부근에서 대학생·시민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88 보도사진연감>

6월29일 오전 9시5분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이날 오전 출근길에 대표위원실 앞에서 기자들을 만나 “굿 모닝”이라고 인사한 노태우는 굳은 얼굴로 회의실에서 들어서 ‘중대결단’을 발표했다. “첫째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한다. 둘째 직선제 개헌뿐만 아니라 민주적 실천을 위해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한다. 셋째 국민적 화해를 위해 김대중씨 등을 사면·복권하고 시국 관련 사범들을 석방한다. 넷째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신장시키기 위해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며 인권 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을 통해 실질적 효과를 거둔다. 다섯째 언론 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여섯째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최대한 보장한다. 지방자치제와 대학의 자율화 및 교육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한다. 일곱째 정당의 활동을 보장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마련한다. 여덟째 밝고 맑은 사회의 건설을 위해 과감한 사회정화 조치를 강구한다. 서민생활 침해 사범을 척결하고 고질적인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한다.” 노태우는 준비해간 8개항의 ‘특별선언문’을 20여분간 읽은 뒤 동작동 국립묘지를 거쳐 아산 현충사로 향했다.

이에 대해 국본은 “정부 여당이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을 환영한다”며 “이는 오로지 민주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전국민의 위대한 승리로서 민족사에 길이 빛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논평했다. 김영삼은 “후련하다. 87년은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중은 “노 대표의 발표를 듣는 순간 인간에 대한 신뢰심이 번뜩 떠올랐다”며 “그토록 억압조치를 한 사람들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한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날 서울 중구 북창동 찻집 가화엔 “오늘 기쁜 날, 차값은 무료입니다”라는 글이 붙었다.

6월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

“두 사람이 단일화한다고 약속하면 선거혁명론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반드시 단일화하겠습니다”

민통련 사무처장 성유보는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에게 후보 단일화를 약속하면 선거혁명론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여부가 있겠냐?”며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단일화가 안 되면 교황 선출 방식처럼 둘이 한 방에 들어가 한 사람이 결정될 때까지 며칠이고 나오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자 이 자리에 모였던 5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뜨거운 박수를 쳤다.

애초 이 자리는 6·29선언에 대한 국본의 방침을 정하기 위한 상임 공동대표·집행위원 연석회의였다. 그러나 이 자리는 처음부터 야당쪽의 선거혁명론과 민통련 등 재야의 군부정권 우선퇴진론으로 의견이 크게 갈렸다. 김대중, 김영삼은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하는 것이며, 민주적 민간 정부가 들어서는 것만 해도 큰 발전”이라며 “우리 두 사람이 단일화하면 반드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통련을 주축으로 한 재야는 “전두환 정권은 헌법을 짓밟았으므로 무조건 퇴진시켜야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킬 수 있다”며 “전두환 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계속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성유보는 이명준, 김용태, 이해찬 등과 구수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성유보는 “우리의 원칙이 옳더라도 적 앞에서 분열하면 다시 전두환 세력이 그걸 노리고 들어올 것”이라며 “6월항쟁을 전체 민주세력의 대동단결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단일화를 조건으로 야당의 선거혁명론을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이명준 등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부문 운동단체들까지 설득했다. 이명준은 “80년에도 권력을 두고 두 사람이 갈라섰는데, 이번엔 정말 단일화가 될지 의문이 들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말했다. 황인성은 “당시엔 두 사람이 단일화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봤고, 둘이 갈라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고 말했다.

7월5일 오전 0시10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이한열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오전 1시께는 ‘심장정지 빈사상태’에 빠졌다. 긴급하게 혈압 상승제를 투입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으나, 새벽 2시5분께 이한열의 심장 박동은 영원히 멈춰버렸다. 주치의 정상섭 박사는 “이한열의 직접 사인은 심폐기능 정지, 중간 선행사인은 폐렴, 최초 선행사인은 뇌 손상이었다. 이한열의 뇌손상은 첫째 두개강 내 출혈, 둘째 뇌좌상, 셋째 두개강 내 이물질 함유”라고 밝혔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이 쓰러졌다. 2시20분께 이한열의 주검은 의과대 본관 건물 지하의 영안실에 안치됐다. 이한열이 남긴 노트엔 당시 젊은이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 오르고 싶다.” 이 글대로 이한열은 민주화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쳤다.

7월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교정~서울시청 앞 광장

“전태일 열사여~! … 조성만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전날인 6월8일 367명과 함께 가석방된 문익환 민통련 의장이 이한열의 장례식에서 20여명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모두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숨진 이들이었다. 문익확은 이렇게 말했다. “밤을 꼴딱 새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많은 열사들의 이름이나 목이 터져라 부르고 들어가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름부르기가 아니라, 가장 애끊는 연설이자 초혼가였다. 문 의장의 쉰 듯, 우는 듯, 떨리는 듯한 부름은 장례식에 모인 수만명의 사람들의 가슴을 쳤고, 마음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이한열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이 단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한참을 울고 난 배은심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한 우리 한열이 가슴에 맺힌 민주화를 성취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살인마, 현 정부는 물러가라! … 한열아, 이제 다 풀고 가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가자, 한열아!” 이날부터 배은심은 자신의 말처럼 아들이 못다 이룬 민주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투사로 나섰다. 교문 앞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숨진 곳에선 이애주 교수가 ‘부활의 춤’을 추고 있었다. 소복 차림의 이 교수는 흰 광목천을 가르고 나아가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섰다.

연세대에서 10만명이었던 운구 행렬은 신촌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30만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온 도시가 슬픔으로 출렁거리는 듯했다. 추모 행렬이 노제가 열리는 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 시청 일대엔 100만명의 시민들이 바닷물결처럼 모여있었다. 북으로는 광화문 네거리·무교동, 서로는 서대문·서소문, 남으로는 남대문·한국은행, 동으로는 을지로 입구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한열의 관 뒤엔 300여장의 만장이 뒤따랐고, 시청과 부근의 호텔들도 태극기를 조기로 고쳐올렸다.

시청 앞 노제는 오후 3시께 사람의 바닷속에서 열렸고, 이한열의 주검은 고향 광주의 망월동 묘지를 향해 떠났다. 운구 행렬이 광주로 떠난 뒤 30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시청 앞에 남아있었다. 이인영 서대협 의장은 시민·학생들에게 청와대쪽으로 향하도록 지휘했다. 이미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대로는 페퍼포그 차량과 경찰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이 거대한 시위대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경찰의 다연발탄(지랄탄)을 맞고 순식간에 흩어졌다. 일부 학생들이 을지로와 종로, 청계천에서 산발적 시위를 벌였으나, 30만명의 군중은 다시 모이지 않았다. 1987년 6월 그 길고 뜨거웠던 시민항쟁이 막을 내렸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에필로그>

1986년 11월5일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대통령 직선제를 현 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1986년 11월5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은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을 서독에서 듣고는 “김 의장이 망명에서 돌아온 뒤 나는 김 의장에게 ‘당신이 나이도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이 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얘기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1987년 9월8일 김대중은 광주를 방문해 50만여명의 환영을 받았다.

10월13일 민통련은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을 추천했다.

10월17일 김영삼은 부산을 방문해 100만명의 환영을 받았다.

10월22일 김영삼은 당내 경선을 제안했다.

10월26일 김대중은 당내 경선을 거부했다.

10월27일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포함한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93.1%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10월28일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10월30일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 출마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12월8일 서울지역 대학생 140여명이 민주당·평민당 사무실과 김영삼·김대중 집에 몰려가 단일화를 요구했다.

12월10일 김영삼·백기완이 ‘군정 종식을 위한 민주세력 대연대’ 추진에 합의했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828만표를 얻어 당선됐으며, 김영삼은 633만표, 김대중은 611만표, 김종필은 182만표를 얻었다.

1990년 김영삼의 민주당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자민련과 통합해 민주자유당이 됐고, 김영삼은 1992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7년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디제이피연합에 성공한 뒤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네번째 출마한 김대중은 <나의 삶 나의 길>이란 자서전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의 염원을 최우선에 두고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고 밝혔다.

2000년 김영삼은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1987년 선거에서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 합당했다”고 밝혔다.

2002년 노무현은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 뒤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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