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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명동성당안 1천명…경찰이 해산 막아
전두환 “군 동원” 엄포에도 국본 “6·26 강행”

등록 2007-06-12 17:02

1987년 6월11~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대학생·시민들의 농성투쟁은 6·10항쟁의 열기를 이어갔을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사무직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사건이었다. <88보도사진연감>
1987년 6월11~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대학생·시민들의 농성투쟁은 6·10항쟁의 열기를 이어갔을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사무직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사건이었다. <88보도사진연감>
6월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 그후 20년 ③ 다큐6월
명동성당 ‘예고없던 6일’

1987년 6월9일 오후 4시40분 연세대학교 정문

“빠바바바바바방” “쐐애액!” “타다다다다닥”

전투소조(일명 솟대·소크·전조·시시) 학생들이 화염병(일명 꽃병)을 던지자마자 경찰쪽에서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했다. 길 건너편의 사복체포조(일명 백골단)들이 동시에 교문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종창(당시 도서관학과 2년, 현 연세대 중앙도서관 한국학자료실 과장)이 정신없이 교문 안으로 5~10m 뛰어들었을 때 뿌연 최루탄 연기속에서 무엇인가가 보였다.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양 팔로 쓰러진 사람을 안고 계속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날 집회가 모두 끝난 뒤 이종창은 자신이 끌고들어온 부상학생이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란 사실을 알았다.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였다.

경찰이 쏜 총류탄(SY-44)에 맞은 이한열은 뒷머리의 피가 얼굴에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났다. 바로 옆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을 때까지만 해도 이한열은 “뒷통수가 아프다” “나 괜찮아?” “온몸이 마비돼” 등 말을 했다. 그러나 오후 5시30분께 이한열은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떠보라는 의사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였다.


그해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 끝에 숨지고 5월18일 범인이 더 있다는 은폐조작 사실이 폭로되면서 “독재 타도”의 불길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그 선봉에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이어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은 독재의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재야와 종교계 등 각계 민주인사들로 구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다음날인 6월10일 전국에서 역사적인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어 본격적으로 투쟁의 불길을 댕겼다.

6월10일 시작된 유명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궁지에 몰린 독재정권이 스스로 불러온 ‘패착’이었다.

그날 밤 10시 신세계백화점 앞. 누군가 명동성당으로 가자고 했다. 서울시립대 2학년 정원오(현 국회의원 보좌관)도 학생들의 물결에 쓸려 명동으로 향했다. “그날 시위가 기대보다 규모도 컸고, 시민들이 박수를 쳐주는 등 호응이 좋았다. 그런 분위기에 고무돼 계속 시위를 하다보니 늦어져 버렸다. 애초엔 밤 10시까지 학교로 돌아가는 전술이었다. 어느 순간 시위대 숫자가 많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 누군가 명동성당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처음에 정원오와 함께 들어간 학생들은 200~300명 가량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1천명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밤 11시께 시위대는 다음 날의 등교와 출근을 위해 농성을 해산하고 성당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을 막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찰은 통로를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쐈다. 시위대도 돌을 던지며 맞섰고, 새벽까지 계속된 이 충돌로 시위대는 농성을 해산할 수 없었다.

“명동성당에서 모인 학생들끼리 의논을 했는데, 일단 하룻밤 철야를 하고 11일 각 학교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1일 각 학교로 전화를 하니 오히려 학우들이 ‘구출·진격 투쟁’을 벌이러 명동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명동성당에 남아있기로 했다.” 정원오의 말이다. 밖의 학생들이 구출투쟁에 나서면서 경찰의 봉쇄는 더 강화됐다.

14일 오후 2시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함세웅은 시경국장 조종석을 명동성당 앞 로열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조종석이 먼저 말했다.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겠습니다. 학생들의 농성을 해산해 주십시오.” “학생들의 연행이나 구속도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어도 됩니까?” “청와대의 뜻입니다.”

안전한 귀가를 두세차례 다짐받고 명동성당으로 돌아온 함세웅은 급히 농성단 대표자들을 모아 이런 사실을 전달했다. 대표들은 오후 6시부터 4시간 동안 마라톤 회의를 벌인 끝에 잠정적으로 농성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전체 농성자들의 토론 결과에 따르기로 했다.

오후 10시30분께 경찰은 일단 주변의 경찰 1500여명을 철수시켰다. 공은 전체 농성단 회의로 넘어왔다. 15일 새벽 1시부터 조별 토론이 벌어졌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다. 결국 아침 8시께 투표에 붙여졌다. 1차에는 반대가 많았으나, 과반수에 못 미쳤고, 2차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 함세웅이 나섰다. 그는 “여기서 해산하지 않아서 결국 정부의 강경진압을 부를 경우 전체 민주화 운동에도 타격이 될 수 있다. 이번 농성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다음 투쟁으로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며 간곡히 설득했다. 그의 설득 뒤 3차 투표에서 119대 94로 농성을 푸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6일 동안의 명동성당 농성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린 1987년 6월26일 서울역 부근에서 대학생·시민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88 보도사진연감>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린 1987년 6월26일 서울역 부근에서 대학생·시민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88 보도사진연감>

6월19일 오전 10시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을 내려보내고, 2개 여단은 전남·광주로 돌려. 부산은 1개 사단과 1개 연대를 보내서 1차로 부산과 대구, 마산의 시위사태를 진압해야겠어. 서울은 4개 연대를 배치해서 주요 대학에 배치하도록 해.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입하도록 해야 돼요. 군에 가스탄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가.”

전두환의 지시에 국방장관 이기백이 대답했다. “20일분을 갖고 있습니다. 풀 가동을 지시했습니다.” 전두환은 이날 안기부장,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군 고위 관계자들을 소집해 비상조치에 따른 군 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했다. 안기부장 안무혁은 “데모 학생들에 대한 작전을 25일까지 끝낼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전두환은 “부산·마산·대구의 이 영남 삼각형이 문제”라며 “부산엔 군 병력을 투입하면서 통금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점점 격해지면서 전두환은 군대 동원을 준비시킨 것이다.

이날 밤 국본 내부에서도 향후 진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불붙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천주교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는 국본 상임 공동대표·집행위원 연석회의가 열렸다.

민통련 상임 집행위원회는 이 자리에서 6월26일에 국민평화대행진을 열자고 제안했다. 민통련 사무처장 성유보는 “군대가 동원되고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물러나면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민주화를 하려면 국민들이 쿠데타를 뛰어넘어야 한다. 저들이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도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벌여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민통련은 6·26 집회를 그대로 추진하겠다”고 강행 주장을 폈다. 민통련 사무차장 이명준, 정책실 차장 이해찬, 서울 민통련 의장 이재오, 민가협의 인재근, 변호사 이상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날 야당과 개신교 대표들은 신중론을 들고 나왔다. 상도동계인 최형우, 김도현은 “오늘 와이에스가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으니 결과를 좀더 지켜보자. 아직 시간이 있는 것 아닌가. 강경하게 나가다 전두환이 군을 동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동안 민통련 노선에 동의해왔던 양순직, 한영애, 설훈 등 동교동계도 이날 따라 조용했다.

이명준이 설훈을 따로 불러 “왜 동교동계까지 갑자기 신중론으로 돌아섰냐?”고 물었다. 설훈이 대답했다. “디제이가 나를 서재로 불러서 책을 고르더니 ‘노란 포스트잇을 붙이라’고 하더라.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책들을 (내가 갇힌) 교도소에 넣어달라’고 하더라. 디제이가 상황을 이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다.”

당시 야당은 전국적 시위가 계속되면 전두환이 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우려 때문에 6·26평화대행진을 강행하는 문제에 신중해진 것이었다. 개신교계의 문동환, 이우정 등도 신중론을 폈다.

민통련 쪽은 “설령 여야 영수회담이 열리더라도 6·26을 추진하는 것이 야당의 협상력을 높여줄 것이다. 야당과 개신교계가 반대하면 민통련과 학생들만이라도 독자적으로 6·26을 밀어붙이겠다”고 주장했다. 야당 쪽이 우려하는 ‘군 동원 가능성’에 대해서도 “군을 동원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다, 동원해도 전국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총을 쏠 수 있겠나. 만일 총을 쏜다면 ‘광주학살의 전국화’인데, 올림픽을 앞두고 과연 전두환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나. 그럴 가능성은 없다. 6·26을 그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해찬은 “1980년에 서울역에서 회군을 했기 때문에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이번 회군하면 전국에서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국본이) 총을 맞더라도 그대로 6·26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격렬한 밤샘 논쟁 끝에 결국 일단 22일까지 전두환의 반응을 지켜본 뒤 다시 논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미 19일 오후 4시30분 군 출동 지시를 보류시킨 뒤였다. 그는 그날 오후 2시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를 만났고, 릴리는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의 ‘압력’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 언론인 존 오버도퍼는 <두개의 한국>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장이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면 올림픽 개최지를 변경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 결과 남한 정부는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그러나 당시 권력 핵심부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두환이 애초부터 군을 동원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김성익은 1992년 펴낸 <전두환 육성증언>에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상대에게는 군부 동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며 “심리 전술을 통치에 원용한 사석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안기부장 특보였던 박철언도 “군 투입 발언이나 지시는 야당이나 재야, 학생들을 자제시켜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 했던 전두환의 고도의 통치술”이라고 평가했다.

22일 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상임 공동대표·집행위원 연석회의가 다시 열렸다. 야당 쪽은 “영수회담 전에 평화대행진 일정을 발표하면 와이에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정국이 경색된다”며 “평화대행진 계획 발표를 늦추거나 일정 자체를 늦춰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개신교 쪽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민통련을 포함한 국본의 다수는 그대로 추진하기를 주장했고, 결국 ‘6·26평화대행진’ 일정을 예정대로 발표했다.

김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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