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 김상수씨
[짬] 여의도 성모병원 54년 전속 이발사 김상수씨
한살 많은 배우 이낙훈 친구처럼
뇌수술 앞둔 환자들한테는 ‘대부’
이발과 함께 치유기원 기도해줘 1961년 11월 명동 성모병원이 개원하며 24살의 젊은 그는 노기남(1902~1984) 대주교의 추천으로 병원에서 일하게 됐다. 모태신앙으로 세례명이 ‘바오로’인 그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안성 미리내 성지 부근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부모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신당동의 한 이발소에 취직해 빗질과 머리 감기는 것부터 배웠다. 면도와 가위질까지 배워 19살에 이발사 면허증을 땄다. 그 뒤 명동에 있던 성모병원의 구내 이발관 이발사로 취직한 그는 깊은 신앙심과 성실한 가위질로 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노 대주교는 물론, 윤공희(92) 대주교와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은 그에게 자신의 이발을 부탁했다. “김 추기경은 항상 자애롭고 포근한 미소로 이웃집 아저씨같이 느껴졌어요. 서민적인 풍모를 듬뿍 풍기시곤 했어요.” 정치인들도 그의 단골이 많았다. 특히 4·19 혁명 직후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은 이발하면서 친해진 그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갔다. 김씨의 둘째아들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장면 국무총리는 아들 이름을 지어달라는 김씨의 부탁을 받고 며칠 뒤 “이 험악한 세상,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며, ‘용선’(容善)이라는 이름을 권한 것이다. 최무룡(1928~1999)과 이낙훈(1936~1998) 등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들도 그의 단골이었다. 당시 성모병원이 명동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살 많은 이낙훈과는 친구처럼 지냈어요.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어요. 아마도 저를 많이 기다릴 것입니다.” 병원에 근무하는 그는 수술을 앞둔 환자들에게 ‘대부’로 자리잡기도 했다. 1960년대 성모병원에는 탄광에서 일하던 진폐증 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세례를 받으며, 인상 좋고 신앙심이 깊은 김씨와 대부(代父)로 인연을 맺었다. “한때 100여명의 환자들이 저의 ‘대자’(代子)였어요.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어요. 물론 제 가슴속에는 아직 살아남아 있죠.” 뇌수술 환자 가운데 그래도 자신을 이발해주는 그에게 인사를 나누는 환자는 다행이다. 의식이 없는 채 그에게 머리를 맡기는 환자가 많고, 교통사고로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환자는 이발을 하던 도중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김씨 대신 사고로 입원한 긴급환자의 뇌수술을 위해 이발을 하러 응급실에 간 한 동료 이발사는 환자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기절해 김씨가 급히 투입되기도 했다. “이발을 해주고 기도해줘도 되냐고 물어봅니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지만, 간혹 기도를 거부하는 이도 있어요. 그러면 저 혼자 속으로 기도하고 병실을 나옵니다.” 최근엔 뇌수술을 두번이나 했으나, 말도 못 하고, 대소변을 못 가리고, 걷지도 못하는 아내를 위해서 김씨에게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남편 보호자도 있었다. 얼마 뒤 지하 이발소에 찾아온 그 남편은 “선생님의 기도 덕분인지, 아내가 말도 하고, 대소변도 가립니다”라며 감사의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나이 먹은 이발사일지도 모릅니다.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가위질을 합니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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