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1심 판결을 비판하는 글을 쓴 판사를 ‘비위 법관’으로 규정해 직무배제 방안을 강구하도록 언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이 판사는 대법원에서 2개월 정직 처분을 받아 논란이 일고 있다.
5일 <한겨레>가 유족의 동의를 얻어 입수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보면, 2014년 9월22일에 김기춘 전 실장을 뜻하는 ‘長’(장)이라는 표시 옆에 ‘비위 법관의 직무배제 방안 강구 필요(김동진 부장)’라는 메모가 나온다. 김 부장판사는
열흘 전인 그해 9월12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에서 피고인 원세훈 전 원장이 선거법 무죄 판결을 받은 데 대해 비판 글을 올렸다. 당시 김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 판결은 ‘지록위마(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 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다”며 “그럼에도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 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주장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당시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인정될 경우 대선의 정당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법원이 정치현실과 타협한 판결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김 전 실장의 언급 나흘 뒤인 9월26일 수원지법은 김 부장판사가 법관의 품위를 손상하고 법원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며 대법원에 징계를 청구했다. 당시 수원지법원장이던 성낙송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는 5일 “판사가 서로 판결에 대해 상호 노골적으로 비판했을 때 판결에 대해 심각한 신뢰 저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징계 청구와 관련해) 정치적 고려를 하거나 외부와 상의하거나 연락한 바는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는 그해 12월3일 김 부장판사가 법관윤리강령을 위반했다며 2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다. 법관에 대한 징계 처분은 정직, 감봉, 견책 등 세 종류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정직 2개월 처분은 과거 법관 징계 사례와 비교해 처벌 강도가 높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 판사는 “실제 정직 처분이 나온 걸 보면, ‘직무배제’라는 의견이 대법원에 흘러들어가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김 판사 징계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징계위 표결 전에 징계위 회부 사실이 알려져 청와대에서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판사들이 참여하는 법관 징계에 청와대의 영향력이 미쳤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의 비망록에는 김기춘 전 실장이 원세훈 전 원장의 1심 판결을 매우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많다. 2014년 9월24일 새정치민주연합 국가정보원 무죄 저지 대책 특별위원회는 당시 국회에서 ‘판결 분석과 진단, 원세훈·김용판 과연 무죄인가?’라는 토론회를 열었는데, 이튿날 김 전 실장은 원세훈 판결 세미나를 거론하며 ‘법원 겁주기’ ‘협박’ 등을 언급한 것으로 돼 있다. 서영지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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