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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작전본부’ 백관수 하숙집 고증조차 안돼…흔적없는 공간들

등록 2019-02-09 09:29수정 2019-02-11 12:28

[2·8독립선언 현장, 도쿄 가보니]
1919년 2·8독립선언 당시 선언서 대표 집필을 맡은 이광수가 선언서 집필을 위해 드나들었다고 알려진 도쿄 와세다대학교 앞 국수집(도쿄 신주쿠구 바바시타초 62). 경영난을 이유로 지난해 7월 100년이 넘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폐업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1919년 2·8독립선언 당시 선언서 대표 집필을 맡은 이광수가 선언서 집필을 위해 드나들었다고 알려진 도쿄 와세다대학교 앞 국수집(도쿄 신주쿠구 바바시타초 62). 경영난을 이유로 지난해 7월 100년이 넘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폐업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1919년 2·8독립선언식이 열린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도쿄 지요다구 니시칸다초 3-3-12).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전소됐으나 최근까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100주년을 앞두고 위치가 고증됐다. 현재는 1층에 세탁소가 있는 집합건물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1919년 2·8독립선언식이 열린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도쿄 지요다구 니시칸다초 3-3-12).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전소됐으나 최근까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100주년을 앞두고 위치가 고증됐다. 현재는 1층에 세탁소가 있는 집합건물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1919년 2월7일 일본 도쿄 와세다대 앞의 비좁은 다다미방.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청년독립단 단장 백관수의 거처에 모여 앉은 조선인 유학생들의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밤 11시를 알리는 괘종 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마룻바닥을 누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밀정인가, 일경인가. 거사를 몇시간 남겨두고 결국 붙잡히는 것인가.’ 일동은 얼어붙었다. 문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잠깐만 나오세요.” 하숙집 주인이었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뒀다는 그는 밤참을 내밀며 조선인 청년들에게 말했다. “자기 나라를 찾으려고 생명을 내어놓고 일하겠다는 그 기백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반의 일본인마저 감동시켰던 조선 청년들의 결기를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선언에 참여한 유학생 가운데 막내뻘이었던 최승만은 “백관수의 거처가 2·8운동의 작전본부처럼 됐다”고 회고했다. 백관수의 하숙집은 최초의 독립선언을 모의한 역사적 장소이지만 현재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유학생들은 일문과 국문으로 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600부를 백관수의 집 또는 또 다른 유학생 김희술의 집에서 등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희술의 집 또한 와세다대 인근 하숙집인 것까지만 알려져 있다.

“백관수 거처가 작전본부처럼”
유학생 중 막내뻘 최승만 회고
최초 모의한 역사적 장소지만
와세다대 근처인 것만 알아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 편집장이던 최팔용이 사장 이토 류타로와의 친분으로 일문 (조선)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1천부를 인쇄할 수 있었던 게이오대 앞 ‘이토인쇄소’(도쿄 미나토구 미타 1-10-11) 역시 지금은 가뭇없다. 도쿄 한복판에서 일본어로 된 청원서를 인쇄했으니 ‘3·1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천도교 보성사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했을 곳이지만 기억하는 이는 없다. 한때 인쇄용 목판이 즐비하던 인쇄소 자리에는 자동차용품 판매소와 철공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2·8독립선언서를 대표 집필한 소설가 이광수(당시 와세다대 재학)가 선언서를 쓸 때 이용했다고 알려진 와세다대 앞 메밀국수 집 ‘산초안’(신주쿠구 바바시타초 62)은 1800년대부터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왔으나 그마저도 지난해 7월 경영난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국내 3·1운동과 관련한 사적지들이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를 중심으로 촘촘히 고증돼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심지어 2·8독립선언식이 진행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의 위치가 고증된 것도 올해 1월의 일이다. 여태껏 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 사적지엔 2·8독립선언지가 ‘도쿄 지요다구 니시칸다초 3-5-2’로 기록돼 있었지만, 최근 현지 조사에서 ‘도쿄 지요다구 니시칸다초 3-3-12’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2·8독립선언 당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1천부를 인쇄한 ‘이토인쇄소’ 터(도쿄 미나토구 미타 1-10-11).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2·8독립선언 당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1천부를 인쇄한 ‘이토인쇄소’ 터(도쿄 미나토구 미타 1-10-11).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1919년 2·8독립선언 직후인 2월12일 다시 한번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시도한 도쿄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앞. 역사적인 공간이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1919년 2·8독립선언 직후인 2월12일 다시 한번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시도한 도쿄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앞. 역사적인 공간이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결의문 등사 김희술 집도 가뭇
청원서 1천부 이토인쇄소 자리엔
자동차용품점과 철공소만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올 초 고증
히비야공원 ‘만세’ 기억마저 증발

1914년 2층짜리 목조 건물로 신축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1919년 2·8독립선언이 있기까지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유학센터’이면서 ‘공동체 울타리’ 구실을 했다. 하지만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으로 불타 없어진 뒤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7일 <한겨레>가 찾은 현장에선 2·8독립선언과 관련한 어떤 표지도 찾기 어려웠다. 현재는 1층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평범한 상가건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일본인 세탁소 직원은 “최근에 와이엠시에이(YMCA)나 언론사에서 찾아와 그런 의미가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2·8독립선언으로 주요 인물들이 구속된 뒤 바통을 이어받은 유학생들이 그해 2월 제2, 제3의 만세시위를 시도했던 도쿄 중심부 지요다구 히비야공원에도 조선인 ‘만세’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백관수와 최팔용 등 선언의 대표를 맡은 ‘조선청년독립단’이 대부분 검거된 뒤 체포되지 않은 최승만·변희용 등 유학생 수십명은 사나흘 뒤 히비야공원에서 전유학생대회를 열고 2월12일 그 자리에서 만세시위를 열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23일에도 시위를 벌이려다 붙잡혔다. 일왕의 거처인 ‘고쿄’를 눈앞에 둔 비 내리는 히비야공원 어디에서도 이젠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공원 입구에는 일본 정부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개관한 ‘영토·주권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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