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주역인 조선청년독립단원 송계백.
한국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이라면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한두명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조선청년독립단 11인’의 명성은 낮다. 사건 당시 일본 밖에 있어 화를 면한 이광수 등을 제외한 9명은 모두 현장에서 붙잡혀 옥고를 치러야 했다. 특히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최팔용과 송계백은 수감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지병을 앓다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숨졌음에도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2·8독립선언을 위한 준비가 진행될 때 목숨을 걸고 서울의 독립운동 진영에 찾아가 일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기도 했던 송계백은 3·1운동 전후 국내와 일본을 잇는 주요 인물이지만 정확한 생몰 연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에 송계백은 1920년 옥사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의 최태육 사무국장에 따르면 1920년 출감 뒤에도 송계백과 관련한 언론 기록들이 등장한다. 1921년 3월29일 <동아일보>에는 ‘평원군 교회당에서 송계백씨가 대연설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의 고향이 평원임을 고려하면 ‘동일인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울러 송계백은 수감 중 건강 문제로 가석방됐다는 기록도 있는데다, 1922년 1월25일 <동아일보>에는 ‘송계백씨가 지병으로 자택에서 숨졌다’는 보도도 실린 바 있다. 그러나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숨진 송계백은 후손이 없는 ‘무후선열’이라 누구도 그의 말년을 추적해주지 않았다.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최팔용도 감옥에서 나온 뒤 1922년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주역인 조선청년독립단원 최팔용.
비극적인 현대사는 뜻을 함께했던 조선청년독립단원들의 운명도 갈라놓았다.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내고 1967년 숨진 김도연과 물산장려운동을 이끌다 1977년 숨진 김철수 정도가 천수를 누린 이다. 김상덕은 6·25전쟁 때 납북돼 1956년 북녘땅에 묻혔고, 조선청년독립단장을 맡았던 백관수 역시 초대 법사위원장까지 지냈으나 1950년 납북돼 1961년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최근우는 사회당을 창당했으나 제3공화국 당시 구속돼 1961년 옥사했다.
이들 11명 가운데도 초심에 등을 돌린 친일행위자들이 있었다. 서춘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주필을 맡는 등 친일행각에 나섰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 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주필로 활약했던 이광수도 대표적 친일파로 후대에 기록됐다.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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