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르포] “시뻘건 불덩이가 펄쩍펄쩍…순식간에 온마을 삼켰다”

등록 2019-04-05 23:19수정 2019-04-06 00:06

대피소 연기 덮쳐 다른 대피소로
시내에선 펑펑 가스 터지는 굉음
“저기 아직 안 꺼졌어” “여기도”
기업 직원·주민 숨가쁜 진화작업
주민 “모든 게 타버려 살길이 막막”
5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마을에서 밤사이 산불에 옮겨붙어 타버린 가옥을 이재민 사촌인 한순애(56)씨가 살펴보며 눈물흘리고 있다. 강릉/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5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마을에서 밤사이 산불에 옮겨붙어 타버린 가옥을 이재민 사촌인 한순애(56)씨가 살펴보며 눈물흘리고 있다. 강릉/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4일 밤 11시께. 택시를 타고 강원도 속초시로 들어가는 길은 전쟁터로 진입하는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속초 시내가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통 붉은빛이 돌았다. 30분 뒤 시내로 들어서자 휴대전화로 긴급재난문자가 들어왔다. ‘[속초시청] 중앙초교 대피장소 불가, 속초의료원 일대 주민들은 속초감리교회, 동명동성당으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속초시청] 4일 23:40분 교동 일대 아파트 도시가스 차단’. 문자는 급박함으로 꿈틀댔다.

자정께 교동 현대아파트에는 산불이 아파트 쪽으로 점점 넘어오면서 시민들이 입은 옷 그대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연기와 그을림 냄새가 자욱했고, 도로는 대피 차량으로 가득 찼다. 간혹 시내 쪽에서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가스 터지는 소리 같다”고 말했다. 이아무개(45)씨는 “긴급재난문자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커튼을 열었더니 밖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며 “강아지만 안고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대피소는 800m 정도 떨어진 교동초등학교에 마련됐다. 600여명의 주민이 이곳으로 대피했다. 영랑초교와 중앙초교 등 다른 대피소로 갔다가 그곳마저 연기로 뒤덮여 다시 대피해 온 주민들도 있었다. 박아무개(27·속초시 장사동)씨는 “영랑초교에 갔는데 거기도 연기가 자욱해져서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시내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교동 케이티 자회사 ㈜화성 사무실 앞에선 직원 10여명이 분주하게 산에 물을 뿌렸다. 한 직원은 휴대전화를 붙들고 “빨리 와! 우리 네트워크 케이블 다 타!”라고 소리쳤다. 미시령로에 있는 영동가스충전소 인근에도 불길이 옮겨붙었다. 충전소 직원들은 “저기도 붙었다!” “저기 아직 안 꺼졌다!”고 외치며 뛰어다녔다. 속초는 밤새 불더미에서 신음했다.

날이 밝으면서 시내 쪽 불길이 겨우 잡혔다. 불이 할퀴고 간 자리엔 잿더미만 남았다. 5일 오전 9시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마을회관에는 주민 20여명이 모여 구호 물품을 나누고 있었다. 고성과 속초 쪽 불은 이곳 원암리의 한 전신주에서 시작됐다. 120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 50~70가구 정도가 소실됐다. 잿더미 속에서 얼굴에 그을음을 묻힌 개들이 배회했다. 장독은 열기에 모두 터졌고, 농기계도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부녀회장 한순희(59)씨는 “집 뒤쪽 하늘 위에서 불씨가 날아와 뚝 떨어지더니 집에 불이 확 붙었다. 집이 날아갔다, 몽땅”이라고 말했다. 이상준(65)씨는 화마로 건평 168㎡ 집이 모두 타버렸다. 이씨는 “불길이 오는 걸 보고 양말 한 짝 챙기지 못하고 탈출했다. 불꽃이 강풍을 타고 눈 내리듯 번져오더니 차에도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며 “이렇게 돼서 사람이 살겠느냐. 당장 갈 데도 없다”고 말했다.

5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마을에서 밤사이 산불에 옮겨붙어 타버린 가옥을 이재민 친척들이 살펴보며 슬픔에 잠겨있다. 강릉/김봉규 선임기자
5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마을에서 밤사이 산불에 옮겨붙어 타버린 가옥을 이재민 친척들이 살펴보며 슬픔에 잠겨있다. 강릉/김봉규 선임기자
고성군과 속초시 일대 주택 125채가량이 소실된 가운데, 속초시 장천마을 40여가구 가운데 절반이 잿더미가 됐다. 마을에서 만난 김정순(74)씨는 50년 넘게 살던 집과 곡식을 저장하던 컨테이너가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그 집에서 아들 공부 가르치고 시집 장가 보내고 컨테이너에는 농사지은 거 넣어놨는데 싹 다 탔어요. 쌀이고 뭐고 다 넣어놨는데 굶어 죽게 생겼네. 쌀이 없어요. 쌀이 다 탔어요.” 마을회관 경로당에서 만난 김아무개(72)씨는 “불에 안 탄 집들도 그을음 냄새가 너무 심해서 다들 못 들어가고 경로당에 모여 같이 밥을 해먹고 있다”고 말했다.

속초시 동북쪽에 있는 영랑호 리조트 인근 펜션들도 피해가 컸다. 벚꽃이 피는 계절 성수기를 맞은 신세계 영랑호 리조트는 철제로 된 창고 2개가 모두 타 무너져 내렸다. 오후 1시께 찾은 리조트 프런트에는 예약 취소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리조트 관계자는 “4일 밤 객실 50개 정도 손님들이 대피했고, 4일 이용자들부터 환불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직접 호스를 들고 불을 끄기도 했다. 영랑호 인근 보람아파트에 산다는 김아무개(52)씨는 “남편과 아들이 호스를 들고 나가 아파트 근처 야산 불을 끄고 새벽 3시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강릉 지역 최초 발화지인 옥계면 남양리에는 110가구 중 25가구가 소실됐다. 불에 탄 집들이 폐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 이재민이 된 이는 100여명이다. 윤우성(68)씨는 “늙은 사람이 돈을 벌어서 집에 다 투자했는데 이제 어떡하느냐”며 울먹였다.

“시뻘건 불덩이가 펄쩍펄쩍 뛰어 순식간에 온 마을을 집어삼켰어요. 살길이 막막합니다.” 고성군 토성면 용촌1리에서 만난 라갑순(70)씨가 말했다. 강원도의 봄은 이렇게 새까만 재가 됐다.

속초/이주빈 오연서, 강릉/이정규, 고성/박수혁 기자 ye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윤석열 체포’ 경찰에 넘긴 공수처 “수사는 우리가” 1.

[속보] ‘윤석열 체포’ 경찰에 넘긴 공수처 “수사는 우리가”

공수처 “경호처 방해 예상 못해…200명 스크럼 어떻게 뚫겠냐” 2.

공수처 “경호처 방해 예상 못해…200명 스크럼 어떻게 뚫겠냐”

폭설 버틴 시민들 공수처에 분노 “영장 들고 단 한 번 체포 시도라니” 3.

폭설 버틴 시민들 공수처에 분노 “영장 들고 단 한 번 체포 시도라니”

공수처,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 경찰에 넘겨 4.

공수처,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 경찰에 넘겨

서부지법, 명태균 관련 ‘윤 부부 휴대폰 증거보전’ 청구 기각 5.

서부지법, 명태균 관련 ‘윤 부부 휴대폰 증거보전’ 청구 기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