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통과를 앞두고 있던 지난 연말,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대한민국의 트렌드 키워드’ 1위는 당연히 공수처법이었습니다. 2019년 12월31일 당일 공수처법은 트위터에서만 8만8천여회 언급됐습니다. 그럼, 두번째는 무엇이었을까요. 뜻밖에도 ‘엔(n)번방 사건’이었습니다. 공수처법에 이어 3만2천여회 언급됐습니다. 당시까지 메신저 텔레그램 안에서 여성을 착취해 성노예화한 사건인 ‘엔번방’을 제대로 다룬 언론은 사실상 <한겨레>가 유일했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해야 했을까요. ‘엔번방 사건’은 무수한 남성들이 이미 알고 있었고, 어떤 여성들은 치를 떨었으며, 피해자만 수십명에 이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희한할 정도로 언론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짧게 존재하다가 무성한 풍문만 남긴 채 사라진 채팅방 운영자 때문에 ‘도시괴담’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 보도 이후 ‘성착취 사건인 엔번방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 수사’를 요청하는 청와대 청원이 20만명을 돌파해 청와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국민 입법 1호 법안이 될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국민 10만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을 국회가 의안으로 처리하는 ‘국민동의청원’에서 엔번방 사건을 국제 공조 수사로 해결해달라는 청원이 1월31일 현재 청원인 6만명을 넘겨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해 11월11일부터 ‘특별취재팀’ 이름으로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기획 보도를 함께한 24시팀 김완입니다. <한겨레> 보도 이후에도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불꽃’ 같은 상황입니다. 대대적인 수사가 이뤄지고 있고 여러 불법 성착취방 운영자들이 검거됐습니다. 하지만 엔번방 운영자 ‘갓갓’과 텔레그램 성착취 카르텔을 완성한 ‘박사’는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여러 경찰서 수사팀이 갓갓과 박사를 쫓고 있고, 갓갓은 사실상 인물을 ‘특정’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단 얘기도 들립니다. 박사는 <한겨레> 보도 이후 방을 폭파하고 잠행에 들어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인 여성만을 골라 은밀한 범죄를 저질러온 양상이 언론에 노출되고 수사망이 조여오자 모습을 감춘 것입니다.
그러던 갓갓과 박사는 1월 에스비에스(SBS) <궁금한 이야기 와이(Y)>가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다루자 잠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둘은 텔레그램에서 이른바 ‘정상회담’이라고 불리는 ‘범죄자의 대화’를 했습니다. 은밀한 범죄를 저지르고 이를 과시하는 허세로 상상적 존재감을 맛본 인터넷 세계의 범죄자들이 현실 세계가 자신들의 범죄에 관심을 갖자 다시 모여서 대응책을 논의한 꼴입니다. 그 대화 내용은 수사기관이 확보하고 있습니다.
물론, 갓갓과 박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텔레그램 성착취방에 처음 입장했을 때, 방에 모여 있는 이들이 올리는 동영상과 이미지, 그리고 여성을 두고 나누는 대화를 보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윤리 감각을 잃어버린 듯한 대화방 참가자들이 오매불망 성착취 영상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꼴을 실시간으로 마주하자 인간에 대한 신뢰가 파괴되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가 박사와 갓갓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성노예 동영상, 성착취물을 기다리는 ‘평범한’ 관전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링크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베’ 사이트가 몰락한 이후 놀 곳을 잃어버린 이들이고, ‘정준영 사건’을 ‘우리도 저들처럼, 버닝썬처럼 해보자’는 범죄 공모로 접수한 이들입니다. 양진호 사건을 거치며 ‘국산 동영상’이 웹하드 카르텔에서 필터링되자 그걸 찾아 몰려든 수요자들이기도 합니다. 그 공범자들이 흩어지지 않는 한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는 언제든 무대를 옮겨 다시 등장할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갓갓과 박사와 같은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속히 검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부디 경찰이 이 싸움에서 무기력하게 패퇴하지 않길, 범죄자들에게 얕보이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입법을 통해 성착취물 유통과 관람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합니다. ‘인터넷에는 원래 그런 것들이 있지 않았느냐’는 안일한 인식이 범죄 방관이라는 각인을 사회에 심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특별취재’를 시작하며 피해자를 보호하며 범죄의 참상을 고발하고, 수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사실을 다 풀어놓는 일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됩니다. <한겨레> 보도 이후 여러 텔레그램 성착취물 방이 붕괴되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거기 여전히 성착취 피해자들이 있으니까요.
김완 24시팀 기자
funnyb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