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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나는 떠났는데…회사는 사과도 없이 복귀한 가해자 ‘승진’시켰다

등록 2023-03-13 11:00수정 2023-03-13 14:34

미투 5년, 지금은… (중) 뒤바뀐 현실
가해자들 미투로 현장 떠났다가
시간 지나 슬그머니 활동 재개
직장 복귀한 뒤 승진하기까지
피해자는 공황장애 등 상처 계속
“몇년 재판하며 왜 싸웠나 허탈”
‘미투 운동’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강요된 침묵 아래 묻혀 있던 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2019년 한 유명 인사의 성추행 혐의를 비판하고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모습.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미투 운동’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강요된 침묵 아래 묻혀 있던 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2019년 한 유명 인사의 성추행 혐의를 비판하고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모습.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의 몫으로 남았다. 피해자는 돌아갈 일상을 잃어버렸고, 가해자는 기어이 돌아와 그 일상을 살고 있다.

2017년 강원도 영월의료원에 입사한 오진영(가명)씨는 부서 선배 ㄱ씨의 성폭력에 시달리다 2019년 회사를 그만뒀다. “성폭력 피해 이후 가해자와 마주치고 지낼 수 없어서”였다. 오씨를 수차례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ㄱ씨는 2021년 대법원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 직장에서 파면됐지만, 반년 만에 복직했다. 강원지방노동위원회가 파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ㄱ씨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사건이 불거진 직후 ㄱ씨는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았는데, 파면이라는 징계를 다시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강원지노위의 판단이었다. 오씨의 피해 사실을 다른 직원들에게 알려 오씨를 2차 가해한 ㄴ씨도 파면됐다가 같은 이유로 복직해 현재 영월의료원에서 일하고 있다. 더욱이 ㄱ씨는 최근 팀장으로 승진까지 했다.

ㄱ씨처럼 2018년 한국 사회에서 ‘나도 고발한다’(#미투)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 가해자로 지목된 고은 시인도 최근 복귀했다. 미투 이후 5년이 되면서 가해자들이 속속 일상이나 사회로 복귀를 하거나 복귀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고은 시인은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실에 해명이나 사과 없이 지난 1월, 5년 만에 시집을 출간하며 문단 복귀를 시도했다. 논란이 커지자 출판사 쪽에서 서점 등에 그의 시집 공급을 중단하기는 했지만, 그의 복귀 과정은 피해자가 직면한 현실과 대조된다. 최영미 시인은 ‘미투’ 이후 시를 발표할 창구가 없어, 직접 출판사를 차려야 했다.

가해자의 건재한 영향력은 피해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소다. 미투 가해자 가운데는 그가 일해온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광주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김은정(가명)씨는 극단 대표 등에게 수차례 성추행·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지난해 공론화했다. 이후 가해자 두명 모두 광주연극협회와 한국연극협회에서 제명됐고, 지금은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대는 가해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김씨는 가해자들이 연극계 동료들과 여전히 소통하고 있고, ‘피해자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식의 허위 사실도 유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2차 가해에 동조한 연극계 동료도 무대에 오른다. 공황장애에 이어 지난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판정을 받은 김씨는 무대에 서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시를 쓰며 마음을 다스린다. “시는 (누구에게도 피해받지 않는) 혼자 하는 예술”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무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3년6개월 형을 확정받았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지난해 만기출소했다. 그가 출소하던 날, 각각 충남과 세종에 지역구를 둔 김종민, 강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지인 70여명이 그를 마중 나왔다. 여전히 안 전 지사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아무런 사과 없이 일상이나 사회로 복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피해자들은 참담한 표정이다. 오진영씨는 “나는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났는데, 가해자들은 그 현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속상하다”고 말했다. 안희정 전 지사의 피해자 쪽 증인으로 나섰던 안 전 지사의 전임 수행비서 신용우씨도 “가해자가 처벌받아 사건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진행형이다. 피해자와 연대자는 아직도 돌아갈 일상이 없다”고 했다. 신씨는 정치 영역이나 공직 사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때 아파트 단지를 돌며 닭꼬치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는 현재 정치나 공직이 아닌 다른 일자리를 구했다.

이에 더해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다. 오씨는 “돌아온 가해자보다 그를 승진까지 시키는 회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가해자가 복직하고 승진했다는 소식에) 지난 몇년간 재판하며 싸운 일이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달라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분노’는 ‘체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투 운동 5년을 맞아 한국 사회가 그동안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다현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우리는 가해자와 함께 일할 수 있는가, 성폭력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 교육과 관련 제도를 마련했는가, 또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방지할 제도와 지원 체계를 갖추었는가를 지금은 묻고 돌아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가해자의 일상 복귀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피해자에 대한 진솔한 사과가 선행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은 “가해자들을 교육할 때 대부분 자신의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피해자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피해자가 가해자의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고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 가해자의 일상 복귀에 앞서 진솔한 사과와 함께 피해자 복귀를 담보할 수 있는 대응 매뉴얼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다현 활동가도 “가해자의 사과 없음은 곧 2차 가해로 이어지고 이것이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더디게 한다”며 “가해자의 사과가 있어야 사건의 피·가해가 명확해지고 그것이 공동체 내 2차 가해를 예방한다”고 말했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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