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 선수에게]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30대 직장인이 보낸 편지
“미안합니다.” “용기 내줘서 고맙습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용기있는 고발에 시민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은옥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10일) ,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 4명 (11일)이 지지의 마음을 담아 심 선수에게 건네는 편지글을 <한겨레>에 보내왔습니다 . 13일에는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30대 직장인 1명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우리는 서로의 용기 ”라고 말합니다 .
“함께 하겠다”는 목소리를 전합니다. 편지글은 doall@hani.co.kr로 보내주세요.
게티이미지뱅크
말 꺼내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주 어릴 적 겪었던 성폭력 사건은 끈질기게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공부한다고 책을 펴고 의자에 앉아도 그날의 기억이 등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습니다. 검은 기억들은 순간의 찰나에 나를 그때 그 시간으로 다시 끌고 가 눕혔습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있는 것이 큰 위로였어요.
그러나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파헤치는 일이요,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내 날것의 수치심이 모두에게 들통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차라리 기억하지 않기를 택했습니다. 그냥 기억의 고리를 끊고 가슴 한구석 두면 괴물 같은 일도 시간이 지나 먼지처럼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몇 년이 지나 조금은 무덤덤해지고, 생각나는 주기도 점점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먼지가 되지는 않더군요.
성폭력은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내 몸에 그 어떤 자국도 없지만, 머리에는 또렷합니다. 석상처럼 멈춰있는 그 장면을 입으로 내뱉는 순간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것뿐일까 두렵습니다. 실체 없는 그때의 기억과 존재하는 지금 내 몸 사이의 간격에 매번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간격은 어쩌면 성폭력을 겪은 모든 이들과 성폭력을 별일 아닌 양 여겨왔던 사회의 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십 대 후반, 학교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서 성폭력 당해본 사람 있어?” 놀랍게도 스물도 되지 않은 모두 청소년이 손을 들었습니다. 몇 초의 짧은 침묵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습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누군가가 더듬던 이야기, 아파트 계단에서 강제로 밀어 넘어뜨리고 자신의 몸을 만졌던 옆집 오빠 이야기, 삶을 뒤흔들었던 성폭행까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터져오는 울음들. 나만 그런 걸 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드는 밤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진심으로 깨달았습니다.
미투 운동의 물결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정도일 줄 몰랐다며 탄식합니다. 문화예술, 종교, 학계, 정치, 운동계 할 것 없이 만연한 성폭력의 문화에 당혹해합니다. 하지만 우리 여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내 엄마와 이모, 언니와 동생이 겪었고, 겪고 있고, 겪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말하기 시작하고 돌이켜보니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네 마음의 어떤 것도 흔들지 못할 일이야”라는 엄마의 말도 맞았습니다. 그 일은 제 내부의 어떤 것도 흔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마주 서서 바꾸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나 혼자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였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다 파헤칠 필요는 없습니다. 한숨 쉬고 나면 흐릿해질 일도 있으니까요. 생채기 하나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든, 말하지 않든, 다시 덮어두든, 잊어버리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모든 결정을 응원합니다. 그저 고통 속에서 살고 있지만 않으면 됩니다. 어둠 속에서 혼자 숨죽이고 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당신이 말하기를 결정했다면 저도 그렇고, 성폭력이라는 상처를 가진 많은 이들이 당신의 손을 잡을 겁니다. 우린 서로의 용기입니다.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드림
심석희 선수 안녕하세요.
저는 회사에서 글쓰는 일을 하는 30대 직장인입니다. 이번에 발표하신 것 보고 국민으로서, 여성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힘을 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보내요.
심 선수가 그동안 큰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멋지다고 박수를 치면서, 한편으로는 굉장히 고독하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화나고 슬픈 일이 있었다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같이 울었습니다. 발표하는 심 선수 영상도 차마 못봤어요.
더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저도 고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해서일 것 같네요. 모르는 사람에게 당한 것이었는데, 상황 직후 가까이에 있던 이모 집으로 맨발로 달려가서 도움을 청했거든요. 그래서 이모와 친척오빠,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그때 들었던 모든 말들..저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던 모든 말이 상처가 됐습니다.
“다른 친구에게 알리지 마. 좋을 거 하나 없어”, “그러니까 왜 따라갔어”, “왜 당하고만 있었어”, “내가 속상해서 그래. 너한테 그러는 거 아냐.(하지만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요…)”
이후에 경찰에게 신고하니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저… 조사를 할 수는 있는데 다른 주민들 생각도 하셔야 돼요. 집값 문제도 있고…”
아마 평생 안고 갈 거에요.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도 최근에야 이야기했어요.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 언젠가는 터지더라고요. 너무 아프니까요. 그리고 최근 사회 분위기도 피해자에게 최대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그냥 말해버렸습니다. 그래도 아직 성범죄 사건을 보면 눈물부터 나요.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도요.
그래서 심 선수가 이번에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아주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요.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있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요. 매일 용기를 내는 것이지요. 이번에 심 선수가 해준 발표는 정말 큰 힘이 됐어요. 한 사람의 매일에 큰 힘 되어주셨다는 것, 알아주면 좋겠어요.
심 선수, 다시 얼음판 위에 섰다고 들었어요. 강하고 굳센 멋진 사람인 것 알아요. 팬들 다 알아요. 그런데 하나, 무리는 하지 말아줘요. 팬들은 심 선수 멋진 모습도 좋아하는데 오래 하는 모습, 템포 조절하면서 하는 모습도 좋아해요(그러니까 뭘 해도 다 좋아한다는 거죠ㅎㅎ). 흔들리지만 말아주세요. 심 선수 너무 잘 타니까.
요즘 정신없고 어렵겠지만, 오늘도 내일도 즐거운 하루하루 보내요.
고마워요.
‘구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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