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경기도 고양시의 한 중고 상점에서 4만원에 산 일본 미쓰비시 수동 재봉틀 ‘에이치에이(HA)1’. 신승근 기자
엘피(LP)와 오디오 말고도 수집벽을 자극하는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수동 필름 카메라, 동전, 우표, 영화 포스터, 맥주회사 달력, 술병까지 아날로그 감성 그윽한 물품은 널려있다. 하지만 한동안 수동식 재봉틀에 강하게 끌렸다. 요즘 인터넷이나 중고 거래 사이트를 뒤지면 옛 향취 물씬 풍기는 수동 재봉틀 판매가 부쩍 많다. 특히 재봉틀 본체를 받치는 주물 프레임에 고재(오래된 목재) 상판을 얹은 콘솔이나 책상은 빈티지한 느낌 때문에 큰 사랑을 받는다. 아예 인테리어 용품으로 상품화한 것도 많다.
재봉틀은 여성을 손바느질에서 해방한 기술 혁신의 산물로 평가받는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46년 미국의 발명가 엘리아스 하우가 수동식 재봉틀을 처음 개발했다. 미국인 사업가 아이작 메릿 싱어는 엘리아스 하우의 박음질 기능에 발로 동력을 만드는 페달식 장치를 결합해 1851년 특허를 얻은 ‘직립 8자형 벨트 재봉틀’로 가정용 재봉틀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싱어는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재봉틀, 전자 재봉틀을 선보이며 재봉틀의 상징적 아이콘이 됐다.
우리나라에선 1900년대 초 이화학당에서 재봉을 정식 교과목으로 가르치면서 재봉틀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1960~70년대엔 필수 혼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마호가니 수납장에 설치한 싱어·브라더·드레스 재봉틀은 가구이자 생필품이었다. 재봉틀은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가 한창인 그 시절 서울 청계천·창신동의 수많은 봉제공장에서 각성제인 타이밍을 먹고 가혹한 철야노동을 버텨내며 옷과 인형을 만들던 나이 어린 소년·소녀의 눈물과 꿈을 상징했다.
시인 박노해는 재봉사 옆에서 일을 거드는 보조원(시다)의 현실을 다룬 시 ‘시다의 꿈’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그들의 서글픈 현실을 이렇게 읊었다.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이런 기억, 너무 긴 바지 깃 등을 직접 손질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수동식 철물인 재봉틀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끌린 나는 한동안 폼나는 재봉틀을 수집하는 꿈을 꿨다. 하지만 짠내 폴폴, 형편에 맞는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황금 스핑크스 로고가 선명한 빈티지 싱어 재봉틀은 가격이 100만원 이상이다. 서울 을지로 재봉틀 거리에선 마호가니 재봉 상판과 서랍 등을 갖춘 앤티크 재봉틀을 수백만원에 거래한다. 바느질 기능보다 인테리어 가구로 효용이 더 큰 제품이다.
엄청난 가격에 헛물만 켜던 나는 2018년에 첫 재봉틀을 장만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 중고 상점에서 손으로 돌리는 일본 미쓰비시 수동 재봉틀 ‘에이치에이(HA)1’을 발견했다. 4만원, 가격도 착했다. 낡고 허름했지만 몸통에 새겨진 금장 로고가 거의 다 사라질 만큼 세월을 간직한 게 되레 매력적이었다. 철물의 묵직함, 바늘이 내려오는 부분에 양각한 문양, 손목에 강한 힘을 줘야만 도는 손잡이 휠의 감촉이 나를 사로잡았다. 알코올로 묵은 녹을 닦아내고 인터넷에서 설명서를 찾아 실 뭉치를 몸체 위 고리에 걸고 바늘에 실을 꿰어 손잡이를 돌리니 오랜 세월 멈췄던 기계가 정상 작동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바늘은 실을 끌어와 한땀 한땀 옷감을 이으며 그 흔적을 새겼다. 인생 첫 재봉틀 바느질은 은근한 쾌감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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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인근에 버려진 재봉틀 주물 프레임을 가져와 인테리어용 구조물을 만드는 모습.
그뒤 재봉틀 철제 주물 프레임을 활용한 앤티크 콘솔이나 책상을 만들 궁리를 했다. 2년여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인근 식당에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폐기물과 함께 버려진 드레스 재봉틀 주물 프레임을 발견했다. 난감했다. 엄청난 무게, 만만찮은 크기에 아직 회사 업무가 끝나지 않아 집까지 가져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게 점심을 얻어먹은 동료가 폐지를 모으는 손수레를 끄는 어르신을 발견하고는 회사까지 가져다 달라며 2만원을 선뜻 건넸다. 비탈길 100여m, 어르신은 횡재한 듯한 표정으로 수레에 재봉틀 프레임을 싣고 회사 주차장 컨테이너 옆 공간까지 물건을 옮겼다.
주말까지 기다려 승용차에 싣고 집에 도착한 나는 상판에 걸맞은 옛날 목재(고재)를 얹고 싶었다.
일단 아버지가 1960년대에 미국 소나무(미송) 상자를 해체한 폐목재로 낡은 궤짝을 만들어 두신 게 있었는데, 이 궤짝을 분해해 상판으로 올려봤다. 허접했다. 더욱이 주물 프레임 네 귀퉁이와 두꺼운 목재 상판을 연결해야 하는데 주물 구멍에 맞는 두께와 길이의 볼트·너트를 동네 철물점에선 구할 수 없었다. 미완성인 상태로 집 베란다 귀퉁이에 2년 이상 방치했다. 한동안 잊고 살다 지난해 이사를 하면서, 버려야 할 고무나무 테이블과 재봉틀 다리를 결합해 주말농장 농막에 갖다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볼트·너트 전문 판매점에서 적당한 크기의 볼트·너트도 찾았다. 그런데 도매상이라 낱개로 팔지 않는다고 했다. 네 귀퉁이와 상판을 이어줄 단 4개의 볼트·너트만 있으면 되지만, 어쩔 수 없이 200개들이 볼트·너트 두 봉투를 샀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콘솔인지, 책상인지 기능이 모호한 작품을 완성해 농막 창가에 비치했다.
완성한 물건은 애초 의도와 달리 너무 크고, 고무나무라 볼품도 없었다. 농막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언젠가 꼭 멋지게 고쳐보겠다는 다짐만 거듭한다. 이런 짠내 기행을 지켜본 친인척도 덩달아 옛 재봉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전원주택에 거주하는 처형은 상판과 서랍까지 온전한 빈티지 재봉틀을 구해 그 위에 오디오를 얹고, 주변에 식물을 배치해 나보다 먼저 폼나게 꿈을 현실화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