됴쿄에서 장식성과 ‘가성비’를 기준으로 구매한 27장의 중고 엘피와 ‘은하철도 999’ 컬러 잡지. 매릴린 먼로, 주디 갈런드, 비틀스, 비치 보이즈 음반 등이 있다.
지난 10일부터 20일까지 일본 도쿄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짠내 수집’이 방문의 주목적은 아니었지만 엘피(LP) 수집 기회로도 적극 활용했다. 일본은 엘피 천국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가수 김연자처럼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동경가요제 등에 출전한 한국 가수의 엘피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또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등 지브리 애니메이션 오에스티(OST) 앨범, ‘은하철도 999’ 등 추억의 만화 영화 엘피를 값싸게 ‘득템’하는 야무진 꿈도 꿨다.
도쿄는 엘피 천국이었다. 디스크 유니언, 타워 레코드, 에이치엠브이(HMV) 등 엘피를 판매하는 전국 단위 체인점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주쿠역 반경 500m 안에 디스크 유니언 점포가 무려 7개나 밀집해 있다. 일본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NHK) 본사가 자리한 시부야엔 무려 14곳의 엘피 전문점이 성업 중이다. 디깅을 위한 지도인 ‘레코드 맵’까지 곳곳에 붙여놨다. 그러나 짠내 수집가인 내겐 그리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일본에 머물며 엘피 전문점 11곳과 수많은 중고서점을 뒤졌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엘피 거래가 활발하고 전 세계 수집가들이 몰려드니 가격 평가는 냉정했고,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높게 가격이 형성돼 있었다. 가끔 한화 3천원 정도인 380엔짜리 특가 중고 엘피가 눈에 띄었지만 가물에 콩 나듯 했다. 알만한 팝 아티스트 중고 엘피는 기본 5천엔(약 4만5천원), 웬만하면 1만엔(9만원)을 훌쩍 넘겼다. 10만엔(90만원)을 넘는 고가 중고 엘피도 넘쳐났다. 음반 분류도 판매점마다 달라 웬만큼 시간을 투자해선 원하는 물건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도쿄에 열흘 동안 머물며 시간 날 때마다 값싸고 쓸만한 엘피를 찾아 나섰지만 횡재의 꿈은 헛되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 관광객이 가볍게 인상 비평한 블로그만 보고 엘피를 찾아 나서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나도 도쿄 도착 사흘째 되는 날 네이버 검색으로 알게 된 신주쿠 타워레코드를 찾았다. 신주쿠역 인근 백화점 9·10층에 있는 타워레코드에 첫발을 디딜 때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엄청난 규모, 무엇보다 케이팝 코너가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중고 엘피는 없었다. 비티에스(BTS), 동방신기, 블랙핑크 등의 음반이 구비돼 있지만 모두 새것이다. 한국보다 가격이 저렴하지도 않다. 점포 한쪽에 팝과 일본 뮤지션 엘피를 취급하는 6개의 큼직한 판매대가 설치돼 있지만 마찬가지다. 모두 새것이었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아바 골드’(7090엔, 6만4천원), ‘듀란듀란 댄스 마카브레’(7290엔, 6만6천원), ‘비틀스/1962-1966’과 ‘비틀스/1967-1970’(이상 1만1590엔, 10만5천원)…. 값싼 것도 4천엔 정도였다. 빈손으로 타워레코드를 나왔다. 중고 엘피 찾는 이라면 신주쿠 타워레코드를 찾는 건 시간 낭비다. 그 정도 가격의 신보는 교보문고 광화문점 음반 가게에서도 구할 수 있다.
신주쿠역 인근에 7개의 디스크 유니언 점포가 밀집해 있지만 정확한 목표를 세워야 물건을 찾을 수 있다. 록 레코드, 시디 액세서리, 클럽 음악 등 점포별로 주력 상품이 세분돼 있기 때문이다. 중고 엘피를 찾는 이라면 처음부터 디스크 유니언에서 중고센터와 클래식관이 한데 자리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나도 신주쿠에서 세 곳의 레코드점을 헛걸음한 뒤 이곳을 발견했다. ‘중고 엘피는 모두 한곳에 몰아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도 가격은 셌다. 내가 찾는 앨범은 중고 가격도 만만찮았다. 재킷과 음반 상태 비(B)급을 기준으로 ‘조니 미첼’ 미국반(4050엔, 3만6천원), ‘퀸 라이브 킬러’ 일본반(4250엔, 3만8천원), ‘벨벳 언더그라운드’ 영국반(4650엔, 4만2천원) 등 모두 4천엔이 넘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온 뒤 찾아 헤매던 너바나 네버마인드 미국반은 재킷과 음반을 모두 비(B)급으로 분류했는데도 무려 6만850엔(55만2천원)에 판매했다. 동묘·황학동 중고엘피판매점에 견줘 도쿄의 중고 엘피 가격은 크게 매력이 없었다.
시부야의 중고 음반 전문점 ‘디스크 유니언 록 인 도쿄’에서 고객을 위한 깜짝 공연이 진행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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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부야, 진보초, 다카다노바바 등의 많은 엘피 전문점과 중고서점을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내가 찾는 엘피를 ‘착한 가격’에 발견할 수 없었다. 와세다 대학 인근 엘피 판매점에서 100엔(900원)짜리 엘피 30여장을 발견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아티스트였고 재킷·엘피 상태도 좋지 않았다. 도쿄 어디서든 비틀스, 레드 제플린,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등의 음반은 대부분 고가였다. 미국과 영국에서 발매한 중고 원반은 기본 1만엔(9만원), 음반 상태나 발매 연도에 따라 2만~3만엔을 넘는 것도 많았다. 시부야의 ‘디스크 유니언 록 인 도쿄’에서 39만4050엔, 우리 돈 360만원에 육박하는 비틀스 중고 엘피를 ‘영접’한 뒤 일본에 오기 전 품었던 대박의 꿈이 헛되다는 걸 확실하게 인식했다. 도쿄에서 꼭 구할 목록으로 적어 온 핸슨, 크랜베리, 라디오 헤드의 음반은 일본에서도 물건조차 구경하는 게 쉽지 않았다. 널려있을 줄 알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오에스티 중고 엘피도 마찬가지다. 점원들은 “나오는 즉시 다 판매되기 때문에 구할 수 없다. 차라리 새것을 사는 게 현명하다”며 대부분 5천엔(4만5천원) 안팎의 새로 발매된 재발매 반을 보여줬다. 한국 가수의 중고 엘피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다카다노바바의 엘피 전문점에서 본 지구레코드 공사가 발매한 ‘윤형주 스테레오 앨범’이 일본 여행 중 본 유일한 한국 음반이었다. 2850엔(2만5천원)의 가격표가 붙어있었지만, 윤형주의 대표곡이 실린 게 아니라서 구매를 포기했다.
결국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놀이처럼 음반 가게와 중고서점을 탐방했다. 그리고 꿩 대신 닭을 사는 심경으로 고서점가가 밀집한 진보초의 중고 엘피점에서 재킷의 장식성이나 ‘가성비’를 따져 중고 엘피 27장을 샀다. 미국반이 아닌 일본반으로 1500엔(1만3천원)짜리 ‘비틀스/1962-1966’과 ‘비틀스/1967-1970’을 샀다. ‘은하철도 999’ 중고 음반을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해 컬러 도판이 많은 잡지 구매로 대체했다.
그나마 신주쿠 디스크 유니언에서 매릴린 먼로가 영화에 출연해 부른 노래를 모은 엘피 ‘레전드’와, ‘오즈의 마법사’ 주연 배우인 주디 갈런드의 음반을 건진 게 도쿄 엘피 디깅의 성과였다. 2020년 러네이 젤위거가 열연한 영화 ‘주디’를 보고 주디의 육성이 담긴 엘피를 구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적절한 물건을 발견한 것이다. ‘더 비기닝’(680엔, 6천원), ‘주디 앳 카네기 홀’, ‘오버 더 레인보우’(이상 480엔, 4천원)를 비교적 저렴하게 샀다. 이 가운데 1961년 4월23일 저녁 미국 카네기홀에서 펼쳐진 공연 실황을 담은 두 장짜리 엘피 ‘주디 앳 카네기 홀’은 관객의 뜨거운 박수, 끊임없는 앙코르 요청, 주디의 생생한 육성, 관객과 함께 ‘오버 더 레인보우’를 떼창하는 소리 등이 담겨 마치 60여년 전 공연장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글·사진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