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랑리, 낙지리, 대박리, 망치리, 대가리, 고자리, 두목리, 방구동….
안 웃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마을 이름일 뿐인데, 웃겨봤자 뭐 그리 웃길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행기자 17년 내공을 자랑하는 이병학 선임기자가 지도 검색과 발품을 팔아 찾고, 만난 120여개의 재미난 마을 이름을 읽다가 빵! 터졌습니다. 그 동네 주민들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기사를 읽을 땐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찔끔 났습니다. 대체 누가, 어쩌자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요?
이런 마을 이름들과 달리 제 이름은 무척 평범합니다. 어릴 땐 그래서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송이, 서연, 소희 같은 예쁜 이름도 많은데 하필 혜정이라니. 어찌나 평범하고 무난한지, 드라마 속 인물 중에도 혜정이는 별로 없었죠. 제가 기억하는 건 딱 한번, <세상 끝까지>라는 드라마(1998년)에서 여주인공 친구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김희선이 고아 출신 백혈병 환자로 나와, 류시원이 맡은 고아원 원장 아들과 ‘계층’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다 죽는다는 줄거리였는데, 혜정이는 기껏해야 ‘여주 친구’만 할 수 있는 이름이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시작한 <닥터스> 여주인공(박신혜) 이름이 혜정이라는 걸 알고는 엄청 반가웠어요. (엉성한 스토리와 뜬금없는 장면·대사로 시청자들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겠다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은 드라마라 아쉽긴 하지만요.)
제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 건, ‘조혜정’이라는 이름에도 누군가의 소망과 축복이 담겨 있고 그 이름으로 살아온 제 역사와 관계, 평판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입니다. 이번 ESC를 만들면서 ‘웃기는’ 마을 이름도 마찬가지란 걸 알게 됐습니다. 그 마을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의 사연이 녹아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된 자연의 역사가 켜켜이 숨어 있다는 걸 말입니다.
‘야동 보고 하고자리, 대가리 돌아 마시리’기사 속, 충북 영동군 고자리에 사시는 한 할머니 말씀엔 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고자가 어때서, 화합만 잘되면 되지!”
조혜정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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