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은 참 낭만적인 소재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문학작품 속에서도, 사진 속에서도요. 출세욕에 사로잡혀 제 발목을 잡은 검사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펀치>에서, 남자주인공 박정환(김래원)의 집이 철길 옆에 있었죠. 가난하지만 다정하고 의로운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의 유일한 공간, 그럼에도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느끼는 무상함과 쓸쓸함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철길은 참 맞춤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김은숙 작가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온에어>에서,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만 속 여린 드라마 작가 서영은(송윤아)이 홀로 걷는 밤, 티격태격하던 드라마 피디 이경민(박용하)이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며 길을 밝혀주던 곳도 철길이었습니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따뜻한 조명, 서로의 설레는 마음을 알게 된 곳이었죠.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에도 철길이 있었습니다. 고무공장이라고 부르던, 신발공장 근처였습니다. 그 회사에서 운영하던 신발 도매점에 가거나, 그 동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가려면 철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땡땡땡. 그 도시를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을 실은 기차가 철길을 지날 땐 차단기가 내려오며 ‘건너지 마시오’란 의미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저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도 기차를 타볼 수 있을까, 철길을 따라가면 서울에 닿는 걸까, 그런 상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범위가 살고 있는 그 동네에 불과한 꼬마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겁니다.
제 기억 속 철길에 또 다른 낭만을 더해줄 곳이 생겼습니다.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로 이어진 ‘경의선 책거리’ 일대 말입니다. 낡은 철길이 젊음을 만나 ‘일상 여행’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책 읽다 사람 구경하고, 좀 걸으며 햇볕 쬐다 다리 아프면 차 한잔 마시고, 세련된 옷과 재미난 소품들 쇼핑하다 배도 채울 수 있는 곳으로요. 아쉬움도 조금 달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선 고무공장이 사라졌고, 철길 주변은 터널로 뒤덮는 바람에 추억을 확인할 수가 없거든요. 빨리,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조혜정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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