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찻집 문에 쓰여 있는 티베트 속담. 이정국 기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만, 나는 예정된 상황에서 변수가 생기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대부분의 일을 즉흥적으로 결정하기보다 미리 머릿속으로 ‘이렇게 진행하면 되겠다’고 계획을 세워두기 때문이다. 계획된 것이 틀어지면 그 자체도 스트레스지만, 다시 계획을 짜야 하는 스트레스가 더해진다.
최근 지독한 감기로 며칠을 앓았다. 웬만하면 감기약을 먹지 않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약을 먹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거푸 계획된 일이 틀어졌다. 원래 평일에 예정돼 있던 취재가 상대 쪽의 사정상 토요일로 미뤄졌고, 내 당번이 아닌 ‘헐’을 쓰게 됐다. 몸도 안 좋은데 예상치 않은 원투펀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토요일 지옥 같은 교통 체증을 뚫고 인천 취재를 다녀와 감기약을 먹고 그대로 잠에 빠졌다. 일요일 일어나 보니 한낮.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무슨 내용으로 ‘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그동안 쓴 ‘헐’을 찾아보니 팔할이 아내 아니면 반려견 호두 얘기였다. 소재를 만들어야 했다. 호두와 아내를 끌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 무슨 일이든 생길 거야.’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날따라 호두는 왜 이렇게 얌전하고, 거리는 어찌나 평화로운지…. 도무지 에피소드가 생길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망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스쳐갔다. <삼시 세끼> 어촌 편에서 노래미 새끼 하나 못 낚은 유해진처럼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한 찻집 문에 쓰여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티베트 속담이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이 문구 덕분에 이렇게 이번 ‘헐’을 마감한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