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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부디 평안하시길

등록 2017-04-26 23:10수정 2017-04-26 23:23

손준현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손준현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선배, 선배, 만약 재미있는 나라, 국민들이 웃음 달고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제가 한 질문인데도 지금 생각해보니 황당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한 달 전의 일입니다. 촛불이 쟁취한 선거, 그 선거를 앞두고 기대와 우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때, ESC 구성원들은 재미와 웃음이 물결치는 가상의 나라를 구성해보자고 결의했습니다.

오만가지 상상이 머리를 파고들지만 고민은 컸습니다. 그때 선배가 공연장을 돌고 터벅터벅 사무실로 들어왔습니다. 달려가 물었죠. “제발 선배의 아이디어를 제게 투척해주세요. 플리즈!”

그는 작은 안경을 올려붙여 당겨쓰고는, 있는 주름을 다 끌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재밌네.” 그러더니 하얀 복사종이를 펼쳐 빨간 펜으로 무대를 그리는 게 아닙니까. 그의 눈이 너무 반짝거려, 밤하늘의 별인가, 북극 오로라인가 싶었습니다.

“자, 어떤 공연이든 중간에 쉬는 시간을 반드시 만드는 거야. 그 시간에 먹을거리와 한잔 술을 돌리는 거지. 살짝 기분이 좋아지면 2막에, 아니면 끝나고 나서, 배우들과 관객들이 다 같이 무대에 올라가 함께 공연 얘기하면서 흥겨운 판을 벌이는 거야. 재밌을 거 같지?” 저는 선배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새로운 공연장 모습을 말해준 거죠.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사라진 세상,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는 세상. 선배가 살아보고 싶은 나라인 거죠.

이제 선배에게 달려가 아이디어를 구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손준현 <한겨레> 공연담당 선임기자의 영결식을 지난 25일 치렀습니다. 그는 지난 21일 밤 공연을 보고 한 저녁자리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22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우리에게 닥친 불행은 10억볼트 번개보다 무섭더군요. 스포트라이트 받는 유명 연극인보다 낮은 데서 묵묵히 대사를 외우는 예술가를 더 사랑한 선배, 부디 평안하시길.

박미향 ESC팀장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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