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꽃게랑’이 선보인 패션 브랜드 ‘꼬뜨게랑’의 모델로 나선 가수 지코. 사진 빙그레 제공
희대의 천재 디자이너 고계랑.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대학 시절부터 여러 명품 브랜드에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어느 날 고씨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자 전국 일주를 떠났다.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던 차, 경북 영덕 오포리해변을 거닐던 고씨에게 벼락같은 느낌이 찾아왔다. 그물망 사이 가득 걸린 꽃게, 질서정연하게 바다에서 올라오는 생명체를 보며 그는 곧바로 이 형태를 본뜬 패턴을 만들었다. 패션 브랜드 ‘꼬뜨게랑’(Côtes Guerang)의 탄생 비화다. 고계랑은 자신의 작품을 빙그레와 일사천리로 계약했고, 첫 광고 모델로 가수 지코를 내세웠다. 패션 브랜드를 들고 식품 회사를 찾아가다니,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냐고? 고계랑의 인스타그램에 쓰여 있듯 “그의 스토리를 들으면 다들 소설이냐고 하겠지만, 소설이다.”
과자 ‘꽃게랑’이 연상되는 이름, 고계랑은 꽃게랑 제조사 빙그레에서 내세운 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 전부 소설은 아니다. 실제로 고계랑이 자신의 브랜드를 소개하는 인스타그램은 운영되고, 지코가 꼬뜨게랑 광고도 찍었다. 꼬뜨게랑의 첫 라인업인 로브(가운), 셔츠, 가방, 선글라스, 마스크 등은 온라인 쇼핑몰 지마켓에서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소개하는 카테고리인 ‘슈퍼브랜드위크’를 통해 지난 7일부터 단독 판매되기도 했다.
너무 천연덕스럽게 자신만만해서 사람들을 사로잡은 이 브랜드, 꼬뜨게랑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기획자인 빙그레 마케팅 뉴카테고리팀 이병욱(31) 대리를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소문로 빙그레 사옥에서 만났다.
꼬뜨게랑 기획자 빙그레 마케팅 뉴카테고리팀 이병욱 대리. 사진 강형욱(스튜디오 어댑터)
이 대리는 꽃게랑을 포함한 빙그레에서 출시하는 과자류 마케팅을 담당한다. 가공유, 아이스크림 등이 주력 상품인 빙그레에서 과자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고작 5%에 불과하다. 빙그레는 2000년대 초반 라면 사업을 접으며 과자류 가운데 판매가 잘 되는 제품만 추려서 남겼다. 현재 빙그레 상표를 달고 판매되는 과자들은 꽃게랑, 야채타임, 베이컨칩, 쟈키쟈키, 뽀로로와 친구들 등 스테디셀러가 대부분이다. 빙그레 과자 제품 중 판매 비중 60~70%를 차지하는 꽃게랑의 올해 나이는 34살(1986년 출시). 과자와 함께 소비자도 나이가 들어간다. 하지만 회사 전체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데다, 꾸준히 잘 팔리는 제품이다 보니 그간 광고나 마케팅에 투자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소비자를 유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대리는 엠제트 세대(MZ·밀레니얼+Z세대·1980년대 초반~2004년 출생)가 열광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요즘 서로 다른 영역의 브랜드가 협업해 상품을 출시하는 게 유행이잖아요. 그냥 컬래버만 하는 것은 이미 식상해졌고, 좀 더 파격적인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 대리는 “저보다도 형”인 꽃게랑과 무엇을 엮어야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중 마치 고계랑이 된 듯, 그의 머릿속에 힙합 패션 브랜드가 벼락처럼 떠올랐다. “제가 힙합을 좋아하거든요.”
브랜드를 찾아 협업을 시도하는 기존의 방식 대신 아예 새로운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꽃게랑을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꼬뜨게랑이라는 아무 뜻 없는 단어도 만들었다. 로고는 꽃게랑 모양을 그대로 활용했다. 광택이 도는 짙은 바탕의 천에 노란색으로 로고 패턴을 새긴 로브를 대표 상품으로 내세웠다. 얼핏 명품 느낌이 났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예고용 게시물을 올리니 둥근 모양의 로고는 ‘3초 구찌’, 화려한 디자인에 대해선 ‘3초 베르사체’라는 반응이 나왔다. ‘부캐’(부차적인 캐릭터의 줄인 말) 전성시대다. 이렇게 꽃게랑의 부캐가 탄생했다.
이왕에 브랜드를 론칭했으니 광고도 찍기로 했다. 가수 지코에게 의뢰했다. 지코는 올 상반기 자신의 신곡 ‘아무 노래’의 안무를 따라 추는 ‘아무 노래 챌린지’로 엠제트 세대를 사로잡기도 했다. 브랜드 배경 설명을 들은 지코는 흔쾌히 허락했지만, 이 대리는 실제 광고 촬영 직전까지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 “지코가 자신의 패션 철학이 확고한 편이라고 들었거든요. 혹시 제품을 보고 못 입겠다고 할까봐 엄청 걱정했죠.” 초조했던 그의 마음과 달리 현장 분위기는 즐거웠다고 한다.
“완벽하게, 새롭게, 꼬뜨게랑.” 꼬뜨게랑 로브를 입은 지코가 흥얼거리는 랩 사이로 ‘와사삭’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동안 꽃게랑이 가졌던 옛날 과자 이미지도 함께 부서졌다. 지난달 30일 빙그레 유튜브, 꼬뜨게랑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선보인 광고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꼬뜨게랑 유튜브 영상은 15일 현재 조회 수 238만 회를 기록했다.
“길거리를 꼬뜨게랑으로 물들이자”는 고계랑의 야심찬 목표 또한 성공했을까. 15일 현재 티셔츠, 가방 등은 품절됐다. 특히 가방은 7일 출시 당일 품절됐다. 빨강과 검정 두 가지 색상 가운데 검정색은 판매 1시간 만에 ‘완판’됐다고 한다. 이 대리에 따르면 “꼬뜨게랑 제품은 팔면 팔수록 손해”다. 소비자들이 지코 광고 영상을 보고 기대하고 구매할텐데, 막상 받았을 때 ‘이게 뭐냐’가 아닌 가성비 좋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대부분 원가 이하로 판매가를 책정했다.
꼬뜨게랑에 대한 반응은 실제 과자 판매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대리는 “아직 판매율 등 수치는 드러나지 않지만, 공장 생산라인 현황을 보면 생산 일정이 당겨지는 등 가시적으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꼬뜨게랑의 인기 비결에 대해 이 대리는 “브랜드를 직접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엠제트 세대의 특성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온라인 브랜드가 오프라인 팝업 매장을 열었다고 하면, 직접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대다. 꼬뜨게랑 제품에 대해서도 ‘나 이거 샀어’ ‘이게 인싸템이래’라고 공유하고, 꽃게랑이라는 브랜드를 새롭게 경험하며 즐기는 분위기를 보인다”고 말했다.
패션 업계에서도 이런 시도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유인영 스타일리스트는 “(과자 브랜드와 패션의 결합이라는) 서로 다른 콘텐츠의 만남이 재밌다”며 “꼬뜨게랑 외에도 곰표 밀가루, 진로 등 여러 제품이 패션과 결합해 결과물을 만들었는데, 그게 세련되고 아니고를 떠나 콘텐츠로서 의외의 아이디어가 되어 패션의 지평을 넓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특히 꽃게랑은 장수한 과자라는 정체성이 강한데, 그런 류의 브랜드들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덧붙였다.
젊어진 꽃게랑은 꼬뜨게랑 이후 새로운 부캐를 선정하는 ‘꽃게랑 이것도 꼭해랑 챌린지’도 고계랑 인스타그램을 통해 진행 중이다. “이 브랜드와 동시대에 현존하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고계랑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