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웅 스님이 천연기념물 88호 쌍향수 앞에 섰다. 조현 기자
전남 순천 송광면 천자암은 천연기념물 88호 쌍향수가 있는 곳이다. 수령 800여년인 두 향나무가 용틀임하듯 비상하는 쌍향수도 보고, 조계산을 등산하려는 이들이 적잖게 찾는 곳이다. 하지만 포장도 안 된 심한 경사길에, 한 칸뿐인 전통화장실은 냄새가 진동해 대중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천자암이 변하고 있다. 지난 13일 조계산 해발 500m 고지 천자암에서 암주 법웅(66) 스님을 만났다.
“오는 길이 보통 험한 게 아니지요?”
법웅 스님이 초행자 내방에 죄송해하듯 물을 만큼 경사 외길이 험했다. 천자암은 송광사 본사에서 걸어 1시간 넘게 걸리는 오지 암자다. 그러니 공양주에게 200만원의 월급조차 주기 어려워 봉사자가 없을 때는 비구승 셋이서 손수 끼니를 해결하는 빈한한 암자다.
법웅 스님은 45년간 이곳을 지킨 은사 활안 스님이 93살로 열반한 2년 전 이곳에 들어왔다. 활안 스님은 손수 농사를 짓고,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3시간 동안 예불 기도하고, 연중 100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산문을 닫아 걸고 묵언으로 폐관정진하던 지독한 선승이었다.
법웅 스님은 활안 스님에게 출가해 7개월간 모시고 산 이후 천자암을 떠나 40여년간 전국의 선방을 떠돌았다. 대표적인 선방인 경북 문경 봉암사 선방의 군기반장 격인 입승을 지낸 선승이 천자암에 온다니 불자들도 아연 긴장했다. 참선만 하는 선승들은 ‘수행 중 출입금지’ 같은 경고문을 붙여놓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경우가 적지 않아서였다.
그가 온 이래 처음으로 천도재비 1천만원의 시주가 들어왔다. 코로나로 더욱 어려워진 암자엔 단비였다. 신자들은 먼저 좌변기마저 고장나 쓸 수 없는 스님 방의 화장실부터 새로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법웅 스님은 “하나뿐인 푸세식 대중화장실에 변이 차 등산객과 방문객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나 혼자 쓸 화장실부터 만드는 건 도리가 아니다”라며 수십년 동안 쌓여 엉덩이에 닿을 듯하던 변부터 퍼냈다. 이어 포장도 안돼 비 오면 전복사고의 위험이 큰 진입로를 시멘트로 포장했다. 드디어 포장길로 천자암에 들어온 순례객은 똥내가 아닌 쌍향수 향내를 맡게 되었다. 천도재를 부탁한 ‘광양 할매’ 보살에겐 “산더미 같은 공양물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살아있는 부처님들인 대중의 근심을 덜어주는 게 진정한 천도재”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살도 흔쾌히 응하며 퇴락한 요사채마저 복구하겠다고 나섰다.
그 뒤 쌍향수의 부식을 막는다며 콘크리트처럼 덕지덕지 붙였던 칠을 당국이 말끔히 벗겨내더니, 등산객과 순례객들 민원에 드디어 순천시가 응해 암자 입구 쪽에 수세식 대중화장실 건축에 나섰다. 또 전남도에서도 좀 더 평평한 임도를 닦았다. 이어 법당 아미타존상 복장에서 370년 전 낙안군의 박명길 가족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기록이 발견되어 지방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었다. 마치 ‘샐리의 법칙’(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한철 수행을 위해 천자암에 온 선승 지범 스님도 “선방 수좌인 (법웅) 스님이 이렇게 대중을 잘 모실 줄은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800살 두 향나무 용틀임하고
본사와 1시간 떨어진 오지 암자
2년 전부터 은사 스님 이어 지켜
옛 소련 해체 때 키르기스 3년 포교
빵·의약품 나눠주는 구호 활동
“선승도 봉사 때 큰 깨달음 얻을 것”
“몸에서 오색광명이 나더라도 중생의 땀과 아픔을 모르면 부처라고 할 수 없다.”
통상 보살행보다는 참선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경향이 큰 선승으로선 의외의 말이다. 법웅 스님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선방만 다니던 그는 1993년 성철 스님의 상좌로 중앙아시아에서 포교하다가 젊어서 열반했던 원명 스님의 당부를 뿌리치지 못해 혈혈단신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렀다. 옛 소련 해체 직후라 배급품이 끊겨 배고픈 현지인들에겐 참선보다 빵과 의약품이 더 시급했다. 그는 고국의 지인과 스님들에게 구걸해 빵과 의약품을 나눠주는 구호활동가가 됐다. 그렇게 3년을 머물고 돌아와서는 여수의 행려병자 전문병원에서 7개월을 머물며 연고 없는 주검들을 씻기고 염불해주며 마지막을 배웅했다. 이후 그는 후배 선승들에게 “단 10구라도 주검을 씻기고 염해주는 봉사를 해보라”고 권유한다. 그만큼 그곳 체험이 심장을 파고들어서다.
천자암 천연기념물 쌍향수 앞에서 법웅 스님이 반려견 송돌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살박이 송돌이는 송광사에서 태어나 살다 어느날 절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 스님 방에 몰래 들어나 난장판을 만든 죄로 천자암에 유배왔다. 40여년 전 법웅 스님은 송광사 행자시절 수각에서 불전에 놓을 과일을 씻는데, 지나던 수좌(선승)들이 그 과일을 먹자 "부처님 전에 올리기도 전에 가져가면 되느냐"고 따지자, 수좌들은 "산 부처들을 못알아보네"라고 했다. 법웅 스님은 "살아있는 부처면 이것도 받아봐라"며 과일을 통채로 수좌들에게 던지자 난리가 났다. 행자 주제에 스님들에게 대거리를 했다며 송광사 대중공사(전체회의)가 열린 것이다. 대중공사에서 참회를 요구받자 "참회는 잘못한 사람이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대들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활안 스님이 뒷통수를 치면서 "천자암에 올라가 나하고 살자"고 했고, 그렇게 해서 천자암에 올라와 활안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송광사에 말썽을 일으켜 천자암에 온 송돌이의 유배가 40년 전 법웅 스닝의 행보를 닮은 듯 하다. 조현 기자
“우리는 석굴암 부처님처럼 정좌만 한 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안거(여름·겨울 3개월간 참선 특별정진)를 마치면 선승들도 외국인 근로자 보호소나 고아원, 양로원에 가서 보름 정도 봉사를 하면 대중에게 도움도 되고, 승려들에게도 큰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활안) 스님이 ‘너는 밭에 안 들어오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만큼 일엔 젬병이었다”거나 “평생 고생하신 (은사) 스님한테 대거리(선문답)하며 몰아붙였던 불효자”라며 고개를 숙였다. 은사 스님에게는 불효했지만, 중생들에게까지 더는 불효할 수 없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는 “책을 많이 못 봤지만 갈등과 고통을 알기 위해 <태백산맥>을 3번이나 읽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천자암에 갓 출가했을 때 아래 벌교에 내려가 식량과 된장을 탁발하곤 했다. 그 벌교에 조정래 태맥산맥 문학관과 보성장여관, 나철(대종교 창시자) 생가, 임경업 장군이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낙안읍성이 있다. 천자암 쌍향수만 천연기념물이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처절히 고뇌하며 살아냈던 분들은 물론, 이웃을 돕고 자신의 가치를 구현하며 자기 삶을 잘 살아낸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천연기념물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