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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도대체 꿈이라니, 나도 내가 아니라니”

등록 2022-03-01 18:43수정 2022-03-13 22:20

[짬] 유심시조아카데미 홍성란 원장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홍성란 시인. 조현 종교전문기자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홍성란 시인. 조현 종교전문기자
요즘 사람들에게 시조는 시에 견줘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시동인만큼이나 많은 시조동인들과 모임이 있다. 특히 최근 20여년은 한국 현대시조의 부흥기라 할 만하다. 그 중심에 잡지 <유심>이 있었고, 유심시조아카데미가 있었다. <유심>은 2016년 폐간됐지만, 유심시조아카데미는 여전하다. 조선의 맥박인 시조의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시조 화요살롱을 열기로 한 홍성란(63)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을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위인성벽탐가구(爲人性僻耽佳句)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사무실 한가운데 조오현 스님이 쓴 투박한 서예 글이 걸려 있다. ‘내 사람됨에 성(性)이 편벽하여 아름다운 구절을 탐하나니, 내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쉬지 않으리’란 두보의 시 구절이다.

유심시조아카데미는 설악산 신흥사의 서울포교당으로, 만해마을의 서울사무소 격인 선불선원의 한 방을 쓰고 있다. 그 방에 만해마을과 만해축전을 만들어 시조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던 승려 시인 무산 조오현이 붓으로 쓴 투박한 두보의 시가 걸려 있다. 홍 원장은 가보처럼 간직한 조오현 스님의 서화들을 조오현 문학관 건립 예정지인 설악산 백담사에 최근 대부분 기증했으나, 이 글만은 사무실에 남겨뒀다. 3년 전 조오현 스님의 열반으로 시조인들은 ‘살롱의 마담’ 같은 후원자를 잃었지만, 고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시조의 맥은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홍 원장은 스승인 조오현 스님을 잃은 데 이어, 지난 설날엔 홀어머니를 보냈다. 코로나 시기인 데다 조용히 보내드리고 싶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 시심으로 마음을 추스르지 않으면 건너기 어려운 겨울을 홀로 지나면서 그는 오직 시조와 함께 봄맞이를 준비했다.

하지만 지난 22일 화요살롱 시작과 함께 열려던 ‘시조의 모든 것, 시조낭송 공개강좌’는 오미크론 확산 탓에 연기해야 했다. 그래도 오미크론 상황이 완화하면 살롱을 시작할 예정이다. 살롱에서는 고시조, 현대시조 이론과 창작 합평, 시조 낭송 등을 함께 공부한다.

앞서 유심시조아카데미는 2009년부터 격주로 월요살롱을 운영해 시조인 등단의 산실로 자리매김해왔다. 매번 10여명이 모여 시조 이론을 배우고, 시조를 낭송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합평도 들으며 놀라운 두보의 시구 같은 창작의 꿈을 키웠다. 그 덕에 이곳 월요살롱 출신들이 각종 시조상을 타고, 만해축전의 시조학술세미나 등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다.

2009년부터 2주마다 월요살롱
10여명 시조 낭송과 이론 공부
시조인 등단 산실로 자리잡아
10년 만의 새 시집 ‘매혹’ 펴내

“조오현 스님에게 큰 가르침 받아
코로나 완화 때 화요살롱 열 터”

<매혹> 표지
<매혹> 표지
홍 원장은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며 등단한 이후 1995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2003년 제1회 유심작품상, 2005년 중앙시조대상, 200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 부문), 2009년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명자꽃> <춤>에 이어 10년 만에 새 시집 <매혹>(현대시학 펴냄)을 출간했다.

‘저 춤도 무늬/ 저 울음도 손짓// 도대체 꿈이라니 나도 내가 아니라니// 당분간 피어난 여기, 이 생생한 찰나여’(불꽃)

‘내 얼굴 편치않은 건/ 내가 날 괴롭힌다는 것// 헛간 데 떠다녔다고 하루가 웃는 들길에서// 나 말고/ 날 쥐었다 폈다 누가 할 수 있겠니’(저녁의 마음)

그의 시집엔 설악산 안갯속에서 언뜻언뜻 보았던, 매혹스러운 깨침의 소식들이 들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시집 6장 가운데 한장은 깨달음을 담은 ‘여시아문’이다. 여시아문이란 불경을 만들 때 부처님을 시봉했던 아난이 가장 먼저 부처님께 들은 이야기를 공개하는 ‘나는 이처럼 들었다’란 의미다. 대부분의 불경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한다.

‘세상이라는 게 가끔 와장창 법문을 하잖아/ 콩나물도 봐 잘 자란 놈부터 뽑아 먹고 마라톤도 봐 앞서가던 놈들이 뒤처지잖아/ 이런 걸 시기 질투라고 하면 직설 아니냐’(가상현실)

‘그 사람 원망스러울 때는 그 사람이 나한테 잘했던 때를 생각하는 거야/ 만날 때는 헤어질 것을 생각하고 헤어질 때는 만날 것을 생각해야지/ 내 감정 이길 줄 알아야 천하를 얻는다’(병법)

그가 조오현 스님에게 들었던 내용을 ‘나는 이처럼 들었다’는 장에 옮겨놓은 시들이다. 조오현 스님은 평소 자기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을 혼내며 못하게 했다. 그러나 홍 원장은 “저는 머리가 나빠 안 적으면 바로 잊어버린다”며 떼를 써서 적어놓곤 했는데, 그렇게라도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허공에 흩어졌을 법어들이다. 이는 그의 삶의 지표가 되었고, 시집을 통해 시가 되었다.

“살아가면서 오해를 받거나 시기 질투를 받을 때 남을 원망하는 마음을 언뜻이라도 비추면 큰스님(조오현)은 ‘남 탓하지 마라’ ‘남의 허물을 보지 마라’ ‘좋은 것만 기억하라’고 했다. 너무 평범한 말씀이지만 일체유심조를 깨우쳐주시는 것이었다.”

그 일체유심조의 ‘유심’으로 봄과 함께 시작할 화요살롱을 꿈꾸며, 그는 <매혹> 첫 쪽을 이렇게 열었다.

‘양달 아래 흔들리는 나무 그늘이/ 당신을 기다리며 깊어갑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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