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어린배움터에서는 회의 참석자들이 한명씩 자기 의견을 차례차례 3번씩 말하며, 차례가 세바퀴를 돌때까지 충분히 말하는 소통방식을 취한다. 사진 사랑어린배움터 제공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2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세번째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 사랑어린마을배움터입니다.
전남 순천시 순천만국가정원박람회엔 꽃들이 만발해있다. 순천만을 동쪽으로 돌아가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순천시 해룡면 농주리 앵무산 기슭에 사랑어린학교가 있다. 폐교터에 대안학교인 사랑어린학교가 이곳에 들어온 10여년 전만 해도 이 일대는 폐가가 늘어가던 산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연 활기를 띠는 마을이 됐다. 그 중심에 사랑어린학교가 있다.
사랑어린학교는 현재 초등과정 12명, 중등과정 10명, 1년의 고등과정인 사랑어린마을인생학교 3명이 재학중이고, 교사 8명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가 따로 없다. 모두가 배우고 모두가 가르친다. 이 학교엔 강사 30명이 있는데, 대부분 학부모였거나 학부모인 어머니 교사들이다. 이곳 마을 멘토인 이현주 목사의 이름을 딴 학교 안 관옥나무도서관에서는 다양한 마을강좌와 동아리모임, 책모임이 진행되고 주기적으로 청년대학, 마을인생대학이 펼쳐진다. 참여자들이 한 집에 모여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종으로 횡으로 100여명이 어우러진다.
사랑어린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을 때부터 두더지란 별칭으로 불리는 김민해 목사가 구심점 역할을 해왔고, 이현주 목사와 임락경 목사, 도법 스님, 음악가 한돌,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장인 안상수 시각디자이너 등을 ‘마을 스승’으로 가끔 모시고 공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의 기조는 서로가 서로를 모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다는 자세다. 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사랑어린마을배움터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인근에 사는 공동체원들의 집에서는 늘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거나 파티를 열곤한다. 맨 오른쪽이 사랑어린마을배움터의 촌장격인 마루 김민해 목사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사랑어린학교 부근엔 수년 전부터 멋진 집들이 한집 두집 늘기 시작해 열두집이 여기저기 들어섰다. 대안학교인 사랑어린학교에 아이를 보낸 학부모들이 아이가 졸업해 떠난 뒤에도 이 학교 주변에서 살고 싶다며 아예 집을 지어 들어온 것이다.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마을공동체살이에 함께하고 싶다며 머나먼 경기도와 울산, 부산, 대구에서 이주해온 이들도 있다. 사랑어린학교의 배움지기(교사)와 관옥나무도서관 등에서 일하는 일꾼의 80% 이상이 경상도 출신들이니, 화개장터를 넘어선 화합의 장인 셈이다.
이 일대 마을에선 밤마다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와 맥주 파티를 열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멀리서 온 학교 손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먹이고 재우는 것도 예삿일이다. 손님을 집에 재우지 않는 삭막한 도시와는 다른 정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여서 놀고 먹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어린마을배움터에선 매일 등교길에 걷는 것을 비롯 자주 걷기 순례를 한다. 사진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제공
사랑어린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어울리는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사람들. 사진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제공
사랑어린마을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 기르는 반려견들을 산책시키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매일 아침 7시30분엔 아침명상을 한 뒤 일과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고, 토요일 저녁 7시엔 토요명상을 하고, 일요일 오후 3시엔 수도원 예배를 한다. 이들이 일요일 모임을 ‘수도원 예배’라고 한 것은 한 수도원 건물에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삶터에서 수도자의 자세로 살다가 함께 모여 예배하자는 것이다.
또 매달 셋째주 토·일요일에는 1박2일 마을마음공부를 한다. 이 모임에서는 노자와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을 주로 공부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의 대화록인 <노자이야기>는 15년째 공부하고 있다. 이 마을마음공부엔 매달 50~60명이 참석하는데, 부산에서까지 온다. 도대체 이 학교와 마을에 무슨 젖과 꿀이 흐르기에 그 먼 곳에서까지 와서 함께 하는 것일까. 이 마을의 운영방식을 보면 ‘사랑어린마을’이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랑어린마을 마음공부. 사진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제공
◇세바퀴회의로 소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를 할 때 참석자들이 빙 둘러앉아 꼭두쇠(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순서대로 자기 생각을 말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이 말할 때 중간에 끊거나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몇번이고 의견이 돌아서, 적어도 세바퀴를 돌면 지혜가 모아진다. 이렇게 충분히 모인 이야기를 토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뜻을 모은다.
힘센 사람이 의견을 독식하지 않고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알고, 순간마다 가슴을 활짝 열어 배우는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배움터정신’의 실천이기도 하다. 또 배움터는 ‘본디 너와 내가 하나임을 알아 어떤 무엇과도 싸우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경쟁하지 않는다’는 ‘비폭력 불복종’을 추구한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어울려 주는 것을 배워가며 난관을 뚫고 공동체의 문제를 푸는 방법을 배우며 살아가겠다는 정신이 ‘세바퀴회의’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랑어린학교 9년 과정을 마치고 배움지기청년일꾼으로 활동하는 이예온(19)씨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토를 달거나 비판하거나 대립하지 않고 화자는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고 타자는 이를 온전히 들으면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세바퀴를 돌다보면 접점이 찾아지곤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주로 학교 공양간 담당을 자처해온 김상숙씨(54)는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마음에 걸린 것조차 묻어버리면 원망이 쌓이고 나중에 분노가 폭발하곤 한다”며 “나도 처음엔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많았는데 세바퀴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서 쌓인 것을 풀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다보니 이분법적 사고가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소통부재의 시대에 이런 독특한 소통방식은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랑어린학교에 9년을 다닌 현수네 엄마 임미경씨는 인근 낙안초등학교 학부모, 낙안마을학교 등의 지역모임에서 세바퀴회의를 적용하고 있다.
사랑어린마을배움터의 명상시간. 사진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제공
◇제비뽑기로 하늘의 뜻에 따른다 사랑어린마을배움터는 천일기도를 하면서 천일마다 운영진을 직접 선출한다. 지난 1월10일이 4번째 천일기도 회향(마침)일이었다. 새로운 천일 기도를 앞두고, 운영진을 선출하기에 한달 전부터 적당한 인물을 추천 받은 뒤 배움터사람들이 둘러앉아 세바퀴 혹은 다섯바퀴씩 의견을 나눈다. 놀라운 일은 촌장격인 마루도 선출 대상이라는 점이다. 참석자들은 세바퀴 혹은 다섯바퀴를 통해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혹여 자신이 추천하지 않은 사람이 선출되더라도 수긍한다는 약속을 한다.
특히 독특한 것은 추천자가 여럿일 경우 사랑어린학교에서 가장 어린 아이가 제비뽑기를 해서 책임자를 정한다는 점이다. 사랑어린학교는 나이 든 세대가 아이들을 끌어당겨 앞에서 지도하던 교육에서 벗어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선생이 학생에게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학생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가슴교육을 한다.
이 제비뽑기도 어른들의 각기 다른 판단과 잣대로 대립하기보다는 하늘마음에 가장 가까운 어린 아이의 순수한 제비뽑기를 따라 마음을 모은다는 점에서 가슴교육에 다름이 아니다. 마루 김민해 목사는 “이 또한 인류의 지혜 전통의 하나로, 자기가 추천하는 사람을 고집하기보다는 제비뽑기에 순응하는 민주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일상에서 마음을 모은다 이곳 배움터는 학교만을 수도터로 삼지 않는다. 진정한 수도·수행은 걸을 때, 밥 먹을 때, 일할 때 매사 일거수일투족에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어린학교 학생들이 초등학교 1학년들조차 매일 아침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순천만 해안가를 2㎞ 넘게 걸어서 등교하게 하는 것도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배움터 정신을 일상의 등교길에서부터 실천케 하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식사를 ‘밥모심’이라고 하는데, ‘나락 한 알 속에 우주’라 한 장일순 선생의 말대로, 밥을 먹을 때도 우주를 모시는 마음자세를 갖는다. 김상숙 교장은 “밥도 매일 먹어야 하고 마음도 매순간 쓰는 것이어서 일상과 마음공부를 분리할 수 없다”며 “순간순간 마음을 모으다보면 저절로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민해 목사는 “사랑어린학교 9년 과정을 마칠 때 자기 옷을 스스로 짓도록 하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9년 동안 하루하루의 마음을 모으는 과정이 쌓여야 한 땀 한 땀 옷을 지을 수 있다”며 “배움터사람들은 일상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함께 살아가는 힘을 기른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