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출신 영성가 토마시 할리크 신부
“하느님은 사건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고정돼 있지 않고) 과정 중에, 역사 속에 있다. 한국에서 출산율이 전세계에서 최저이고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부강해지는 것만을 쫓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발전에 가려진 그림자가 많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말하는 하느님의 징표를 식별하는 게 우리들의 임무다.”
체코 출신의 영성가인 토마시 할리크(75) 신부를 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국제가톨릭형제회수도원에서 만났다. 지난 1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노구를 이끌고 영호남을 넘나들며 매일 초청강연을 이어온 그는 출국 하루전 짬을 내어 ‘종교가 갈 길’을 전해주었다.
할리크 신부는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공산 치하에서 1978년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교회 활동을 하면서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수립된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외부자문단과 체코 주교회의 총대리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 캠브리지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초빙교수를 지내고, 프라하 카를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체코에서는 하벨 이후 대통령 물망에 오를 정도로 국민적 신망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상처 입은 신앙> <신이 없는 세상>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등의 베스트셀러가 있으며, 영적 자유와 인권 보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로마노 과르디니 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4년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주 치명자산 평화의전당에서 ‘위기의 시대, 신앙의 길을 찾다’라는 제목의 1박2일 묵상회를 이끌었다. 지난 1일 밤 고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할리크 신부는 자신이 신부가 된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스무살 때 가까운 친구가 공산정권의 탄압에 맞서 대중들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분신을 한 이후 친구의 데드마스크(얼굴 모형)를 가슴에 안고 ‘나는 어떤 식으로 대중을 깨울 것인지’ 고뇌하다가 사제가 됐다”고 고백했다.
“인간은 기계나 부품이 아니다. 유일무이한 개별 존재들이다.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 눈을 뜬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가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할리크 신부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이념적 양극단에 가있으므로 가톨릭은 제3의 길로 인간들을 위한 사회교리를 제시하고 있다”며 “교회는 이념에 저항하는 면역체계를 만들고 폭력과 독재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 연대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폭력을 방관하면 폭력의 동조자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며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추도록 우리는 함께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할리크 신부는 부익부빈익빈이 가속화하는 세상에서 종교마저 부자의 종교, 번영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과 관련해 “종교는 성공이나 성취, 돈이 나오는 기계장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부와 번영과 성공은 사막에서 금식기도하던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하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탄을 ‘가라’고 쫓아버렸다. 일부 종파들이 설사 그런 것로 유혹하더라도 그건 예수님의 가르침도, 복음도 아니라고 ‘노’라고 할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성공이나 권력이나 성취를 이룬 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돈에 얽매인 삶에서 풀려나 내적인 자유를 얻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물질적 번영을 약속하는 종교가 아니다. 내적인 영적 자유를 추구하는 종교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유에 있다.”
할리크 신부는 한국판으로 출간된 <그리스도교의 오후>(분도출판사 펴냄)를 통해 유럽의 텅빈 교회, 닫혀 있는 교회 현상을 예로 들며, 인생이 하루라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한창 성장하는 아침의 시기가 아니라 하루가 저물어가는 오후라고 칭했다. 그는 짧은 방한 기간 동안 전주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과 광주가톨릭평생교육원, 칠곡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교육관에서 강연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에 종교가 가야 할 길을 역설했다.
“교회 역사에서 보면 근대 이전은 오전이다. 오후인 지금은 성장보다는 성숙을 꾀해야 하는 시대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지 진리를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이교도인이나 무신자들을 개종하려고 하기보다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으로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에 마음을 열고, 구도자들과 대화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동서양의 지혜가 교환되도록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할리크 신부는 한국에서 사이비교주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 것과 관련해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 없는 종교는 위험하다’고 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을 들려주며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지성적 신앙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토마시 할리크 신부.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0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다섯번째는 체코 출신의 영성가 토마시 할리크 신부입니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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