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휴심정 순례기

양평 꽃밭마을공동체

등록 2005-10-28 22:47

‘사랑의 울타리’안에서 재활의 텃밭을 가꾼다 양평 꽃밭마을 노숙자들이 사는법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꽃밭이라는 마을 이름대로 꽃잎 같은 작은 산들이 둘러싼 화전리의 폐교된 분교 자리에 노숙자쉼터 ‘사랑의 울타리’가 있었다. 한 몸 누일 데마저 없어 땅을 방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한뎃잠을 자던 120명이 머물고 있는 보금자리다. 

지난 16일 점심 시간. 쉼터 가족들이 식당 탁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비록 반찬은 김치와 샐러드가 전부지만 쉼터 가족들의 얼굴엔 행복한 기운이 피어 올랐다. 

백혈병 투병 교수 출신 정창덕원장 생명 건진뒤 노숙자속으로… 

서울·용산역 떠돌던 120여명 고추·상추·꽃 키우고 문구용품 조립해 용돈 마련 

마을 순찰까지 돌며 자활 노력 “이런 마음 편한 생활 얼마만인지…” 

정창덕(42) 원장이 식탁에 앉자 한 할아버지가 “아주 맛있다”며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라”고 권했다. 

한국과학기술원 박사 출신으로 30대에 이미 서일대 교수, 한국창조성개발학회 회장으로서 앞만 보고 달렸던 정 원장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은 1996년 혈액암인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려 다른 사람들의 헌혈로 생명을 건진 뒤였다. 

98년 초 백혈구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교수직에 복귀하자 그는 소리 없이 자신을 도와준 이들처럼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서일대 학생들과 ‘119 구조대’란 모임을 만들어 서울역과 용산역을 찾아 노숙자들에게 김밥도 나눠주고 말동무가 돼 주었다. 

이어 98년 4월에는 내친김에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자락에서 사재를 털어 노숙자 70여 명을 모아 3박4일씩 ‘단기재활캠프’를 열었다. 노숙자들은 캠프가 끝날 즈음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이제 새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절반 가량은 직장을 얻거나 귀가하지 못하고 다시 거리로 나서거나 캠프로 돌아왔다. 

그래서 정 원장은 기도원을 빌려 노숙자들이 장기적으로 쉴 수 있는 쉼터를 꾸렸다. 이때부터 서울시에서 1명당 한끼에 920원씩의 식대나마 지원돼 월급과 강사료만으로 운영하던 살림도 조금은 숨구멍이 트이기 시작했다. 

정 원장은 2000년 4월 사재를 털고 일부는 빚을 얻어 지금의 ‘사랑의 울타리’ 터를 구입해 이전했다. 

그러나 늘 노숙자들의 ‘술’이 말썽이었다. 가끔씩 술에 취한 노숙자들이 마을회관의 유리창을 깨며 행패를 부리고 나면 마을 주민들의 항의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소가 죽거나 개가 사라져도 노숙자들을 의심했다. 

정 원장은 주민들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자립하도록 내보내고, 말썽을 상대적으로 덜 일으키는 50대 이상으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도 술로 인한 말썽으로 1년에 20여 명은 이곳에서 떠나고 있다. 

그런데도 정 원장은 가족마저 떠나와 삶의 의욕을 잃고 숨져간 노숙자들을 지켜보아 왔기에, “남이 모르게(술을) 마셔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목사이면서도 노숙자들에게 예배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노숙자들도 이런 마음을 안 듯 얼마 전 몸져누운 정 원장의 집에 노숙자들이 앞다투어 산에서 약초를 캐어왔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선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돌아가며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해 눈물을 쏟게 했다. 

정 원장은 ‘자발성’을 가장 중요시했다. 노숙자들에게 용돈까지 줄 수 없기에, 그들이 부업을 해서 담뱃값 등 용돈을 마련하게 했다. 

쉼터에선 오랜 노숙으로 몸이 상해 거의 누워만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절반 이상이 문방구 용품을 조립하는 등 무엇인가 일을 했다. 

문방구용품 조립해봐야 하루 고작 1천원 벌이에 불과하지만 강아무개(56)씨는 “이렇게 마음 편히 살아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라며 자족한 듯 손을 놀렸다. 

또 한 할아버지에게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다섯 명씩 한방에서 같이 지내면 싸우지는 않느냐”고 묻자 “가정에서도 싸움이 있지 않으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어디를 가나 자신들을 ‘뜨내기’로만 생각하고, 거처도 자신도 소중히 가꾸지 않기 일쑤였던 이들은 이제 1500평의 밭에 자신들이 먹을 고추와 상추도 심어 가꾸고 있다. 또 자율방범대를 결성해 스스로 마을 순찰을 돌기도 하고, 촌장제를 만들어 ‘말썽꾸러기’가 아니라, 어른 구실을 되찾아가고 있다. 

쉼터를 나오다 보니, 잠시 전 밭에서 고추를 심던 한 할아버지가 또 쉼터 안에 코스모스 모종을 심고 있었다. 정 원장이 씨앗을 심은 쉼터를 이제 노숙자들은 이렇게 스스로 꽃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031)773-4982. 양평/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2년 5월 23일자)

“나만 열심히 살면 된다고요? 나눌줄 모르는 삶은 죽은 삶이죠” 사경 헤맨 끝에 새 인생 정창덕 ‘사랑의 울타리’ 원장

“‘남에게 피해 안주고 내 삶 내가 열심히 살면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출세와 성공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며, 나눌 줄 모르는 삶이야말로, 죽은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창덕 사랑의 울타리 원장은 아내와 어린 두 아들과 가족, 동료, 제자들을 비롯해 이름마저 밝히지 않은 채 선뜻 피를 기증한 수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백혈병을 이겨냈다. 

특히 그의 삶을 깨어나게 한 것은 그동안 성공에 급급해 어떻게 사는지조차 모르고 지냈던 동생이었다. 그는 뒤늦게야 동생이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고 집을 나와 노숙자가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동생은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방 한칸을 얻어 병든 채 길에서 쓰러진 이름 모를 할머니를 돌보았고, 무정한 형의 병실을 1년반 동안 지켰다.

그가 여섯 차례에 걸친 항암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싶다며 울 때 동생은 “비록 잠시 몸이 아프긴 하지만 형이 얼마나 축복을 받은 사람인 줄 아느냐”고 일깨워 주었다. 

정 원장은 어려서 워낙 가난해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서울에 상경해 병따개공장에서 1년 동안 죽도록 일해 학비를 번 뒤 다시 고향인 전북 임실로 내려가 중학교에 진학했고, 대학도 진학하지 못한 채 취업해 뒤늦게 유학길에 올랐다.

정 원장은 최근 쓴 〈플라타너스의 희망〉(호미 펴냄)에서 “한을 풀기 위해 출세하려고 가족과 은인들까지 모른체하고, 아픈 사람을 위해 헌혈 한번 한 적이 없으니,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지금도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지 모르겠다”며, “다른 사람의 헌혈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백혈병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귀중한 깨달음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교수일과 쉼터 원장 등 많은 일을 함께 하느라 바쁘게 지내면서도 노숙자 할아버지와 부자와 같은 정을 나누는 그는 “새 인생을 맛보고 있다”고 행복해했다. 

조현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휴심정 많이 보는 기사

천도재도, 대입합격기도도 없는 사자암의 향봉스님 1.

천도재도, 대입합격기도도 없는 사자암의 향봉스님

울산 울주 정토마을자재병원 개원식 2.

울산 울주 정토마을자재병원 개원식

사랑이란 무엇인가 4.

사랑이란 무엇인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나옹선사는 5.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나옹선사는

옆에서 보면 더 잘 보인다 6.

옆에서 보면 더 잘 보인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