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원'이기심 내려놓고 하나되어 평안합니다'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새벽 6시. 예배당의 적막을 깬 것은 아처 할아버지였다.
"나는 사회문제, 교회문제에 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형제들이 예전에 내게 얘기한 것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곤 합니다. 개개인에게 소홀했던 점을 고백합니다."
서구적 외모와 어눌한 말투가 아니었다면 그가 예수원 가족들이 아처(본명)나 할아버지로 부르는 대천덕 신부라는 것을 방문자들이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널리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용서를 빌듯이 바로 자신의 허물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공동체 가족들에 대한 잘못과 이기심에 대해 고백했다. 예수원은 이렇게 아침을 열었다. 이어 이들은 예배당에서 방문자 100여명과 함께 그릇에 반밖에 채워지지 않은 밥과 김치와 된장, 야채국이 전부인 아침상을 비웠다. 그리고 아침 8시가 되자 중세 수도사 성 베네딕트의 '노동은 기도요, 기도는 노동이다'는 정신에 따라 목장과, 농장, 출판부 등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에 빠졌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해발 920m의 태백 준령 산골짜기에서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은 어찌보면 기적"이라는 한 회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부부끼리도 사네 못사네 하는 세상에서 무려 82명이 함께 사는 것이 쉬울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한집에서 혼자 살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쉽게 합니다. 같이 살아야 진정으로 변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대 신부가 말하는 공동체에서 사는 이유다.
"살아온 배경도, 신앙도 다른데 함께 살자니 부딪치는 일이 왜 없겠어요."
98년부터 목각실에서 다른 3명과 함께 십자가와 기도의자를 만드는 기드온(37)은 "하기 싫은 마음과 이기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이곳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기심과 불화는 개인의 고통과 함께 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진다. 지금도 10명뿐인 남자 정회원이 몇년전에는 불화로 3~4명밖에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예수원 가족들은 남을 미워하고, 다투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점심 후 1시간, 밤 9시부터 1시간의 소침묵에 이어 밤 10시 대침묵의 시간을 통해 성령과 대화한다.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는 삶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발휘하곤 한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기드온의 얼굴에서 불편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젊은 날 숱한 방황을 겪고 93년 이곳에 들어와 조각실에서 일하고 있는 한광수(45)씨가 월 수당으로 고작 2만3천원을 받으면서도 "어느때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년4개월째 수련중인 박대형(31)씨도 "일과 기도 속에서 내 속에 있는 악하고 못된 성질들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나보다는 모두를 생각하는 공동체적 정신은 중보(남을 위한)기도로 이어진다. 정오예배 때 그들은 가장 애절한 목소리로 자신이나 예수원이 아닌 굶주리는 자, 병든 자, 실업자 등을 위해 기도한다. 이곳 유치원생 8명도 따로 고사리손을 모아쥐고 남을 위해 기도한다.
재정자립도가 50%밖에 안되는 빈궁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예수원이 1년에 1만여명의 방문자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는 것도 이런 나눔의 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원은 방문자를 위해 프로그램은 따로 두지 않고, 2박3일 동안 공동체의 예배와 노동에 동참하거나 침묵 속에서 스스로 성령과 대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영적 갈증 해소를 위해 종종 이곳을 찾는다는 서울 장암교회 전도사 박스데반(37)은 "이곳은 나 외에 사회와 나라와 세상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서울 남서울은혜교회에 다니는 이은주(29)씨는 "개신교인들에겐 이곳의 조용한 분위기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침묵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위를 살펴보니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닌 것이 없음을 새삼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예수원은 금요일까지 방문자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주말밤엔 서로에 대한 감사의 시간을 갖는다. 최근 유산의 아픔을 겪은 홍의방(42)씨는 "나이가 많아 영영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여러 가족들의 위로와 도움이 힘이 되었다"며 눈물을 적셨다. 이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들 주경이를 둔 한 회원은 "김마가렛 자매가 나보다 더 주경이를 잘 돌보아줘 아이가 좋아지고 있다"며 눈물로 감사를 표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예배시간 내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안기며 재롱을 떨던 주경이를 꼭 껴안음으로써 그의 마음에 공감했다.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들은 눈 쌓인 골짜기를 내리쬐는 햇살이 되어 코이노니아(하나됨)를 이렇게 싹틔우고 있었다. 태백/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27일자)
#65년 천막서 시작한 초교파적 수도 공동체
65년 성공회 소속 미국인인 대천덕 신부 부부와 건설 노동자 등 12명이 함께 천막에서 시작한 예수원은 초교파적 수도공동체다. 예수원 정회원이 되려면 일년에 봄과 가을 두차례 모집하는 수련반(3개월)을 마친 뒤 일단 하산해 예수원의 승낙을 받고 1년씩 수련을 두차례 거치면 된다.
현재 예수원에는 정회원 32명과 수련생 등 82명이 하루 3시간의 기도와 7시간의 노동으로 살아간다. 또 십자가와 기도의자를 만드는 목각실과 양을 기르는 목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목장 150만평에 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기도중이다.
예수원은 매년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 1만여명이 방문해 안식을 얻고 있다. 방문 1주일 전 예약 후 2박3일 동안 방문할 수 있으며, 숙식비는 없고, 형편에 따라 헌금할 수 있다.
(대천덕자서전)과 부인 현재인씨가 쓴 (예수원 이야기)(홍성사 펴냄)가 이곳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대천덕 신부와 부인 현재인씨 치밀한 신부 느긋한 부인의 '서로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사랑' 사람도 집도 많이 바뀐 예수원에서 한결같은 것은 대천덕(84) 신부와 부인 현재인(80)씨의 금실이다.
중국에서 장로교 선교를 하던 부모님 때문에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대 신부는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엘리트이지만 선원과 노동자 생활을 하기도 한 실천가다. 일처리가 치밀하고 빠른 그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스타일이다. 반면 대학 재학시절 메이퀸에 뽑히고 미국의 40개 주에서 60여회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던 부인 현씨는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차분한 타입. 스위스풍의 예수원을 설계한 것도 현씨다. 그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체질이다. 한동대 교수였던 막내딸 버니가 두 사람의 성격테스트를 했더니 단 하나도 공통점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전 7년 동안 짝사랑했던 대 신부의 부인 사랑은 여전하다. 57년 한국에 들어왔지만 미처 말을 익히지 못한 현씨를 위해 예배 때마다 소곤소곤 통역을 해주는 대 신부의 모습은 예수원에서 놓칠 수 없는 광경이다. 드러내지 않는 현씨의 내조 또한 남다르다. 현씨는 지난해 말 대 신부가 심장마비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달포동안 입원해 사선을 넘나드는 동안 병간호를 하면서도 대 신부에게 온 편지에 일일히 답장한 것으로 밝혀져 퇴원한 대 신부를 감격케 했다.
98년 금혼식(50주년)을 치른 이들은 결혼 이후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서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며 노부부는 웃는다.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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